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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날

나무도 상처받는다.

by 도시 나무꾼 안톤

나에게 목공방은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공간이다. 목공작업을 하지 않아도 스피커를 통해 볼륨을 한컷 올린 8090 음악과 녹슨 화목난로 속에서 나무가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다. 비가 내리는 밤이면 특히 더 좋다.

먼지 뒤집어쓴 운동복 차림의 50대 남자가, 쏟아지는 빗속 창고 같은 공방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불쌍하다 여길지 모르겠지만, 난 홀로 그 안에서 커다란 낭만을 불태운다. (사실은 누가 볼 일도 거의 없다. 작은 산아래 너무 한적한 귀퉁이에 있어 특히 밤에는 정말 아무도 없다)


공방 외벽 판넬을 때리는 빗소리, 터져라 울려대는 스피커의 음악, 안팎으로 큰 소음이 울리는 그때도, 난로 속 목재들이 타들어가는 소리는 작지만 선명하다. 난로 앞으로 나오는 온기가 소리를 품에 안고 나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한층 어둡고 서늘해진 밖과는 충분히 대비되는 난로의 따스한 온기, 목재가 타는 소리는 과거의 추억으로 곧장 안내한다. 마침 음악도 8090이다. 태울 목재는 충분하니 긴 시간 과거여행이 준비된다. 이만하면 지저분한 공방도 꽤 만족스럽다.

공방에서의 이런 시간은 나의 여러 아바타로부터 잠시 해방시켜 준다. 기울어가는 커다란 방송사의 프로듀서로서, 큰 세상을 앞두고 두려워하는 자식을 키우는 중년남으로서, 새로운 길을 차곡차곡 열어가는 아내의 남편으로서, 늙고 병드신 부모님을 보살펴야 하는 아들로서의 페르소나(persona)로부터 나와, 홀로 나 자신과의 시간을 갖게 해 준다.


KakaoTalk_20240126_152818842.jpg 목공방 난로 속 나무가 타들어가는 모습과 소리는 따뜻하고 평화롭다


참 신기하다.

불은 몇 시간을 그냥 보기만 해도 봐질 것 같다. 불길에 던져진 나무토막은 재가 될 때까지 계속 제 모습을 바꾼다. 우리 인생도 저렇게 활활 타오르다 소임(?)을 다하면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되는 것일까... 그래서 그런지 재가 되어 불 품 없어지는 상태가 되기 전에 서둘러 또 다른 나무토막을 넣는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8090 음악은 나를 청년시절로 돌려보낸다. '신이 허락한 타임머신이 음악'이라는 말이 실감 나도록, 새로운 노래가 나올 때마다 어떤 시간, 어떤 공간의 내가 나타난다.


하지만

추억이 늘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몸서리를 치는 순간이 있다. 누구에게나 트라우마로 남았던 기억들이 금세 추억을 장악해 버린다.

억울했지만 항변조차 못했던 일들, 두고두고 생각날 때마다 이불 킥하고 마는 순간들,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지 못했던 기억들, 떠올릴 때마다 슬프고 괴롭고 창피했던 기분이 다시 느껴지는 일들... 지구에서 반세기를 지나오면서 그런 상처의 기억도 켜켜이 쌓여간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상처의 세월만큼 상처를 받아들이는 나의 세월도 그만큼 자랐다는 점이다. 이젠 성당에서 기도할 때도 '좋은 일이 생기길' 기도 하지 않는다. 대신 '어떤 일이 생겨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시길' 기도한다. 상처를 버티지만 말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무에게도 ‘오래 버팀’만이 아니라 ‘받아들임’이 있다. 상처를 잘 받아들인 나무가 오히려 귀해지는 경우다.

잘 썩은 상처가 오히려 나무를 귀하게 만든다. 나무에 비가 스며들면 빗물이 나무를 결을 파고들어 자리를 잡는다. 이내 그 물기가 있던 자리에 곰팡이균이 가세하며 썩어간다. 그 썩어간 흔적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특하고 유일한 무늬를 만드는 것. 이런 목재를 스폴티드 우드(Spalted wood)라 부른다. 그리고 이 목재는 이전의 깨끗한 생나무보다 훨씬 귀해진다. (다시 말해 '비싸진다')

나무의 결을 따라 침투한 균이 만드는 상처는 세상 하나뿐인 패턴의 선들을 그려주고 다른 어떤 나무와도 다른 개성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가치를 만드는 것은 단순한 기능이상의 차별성임을 확인하게 해 준다.


KakaoTalk_20240121_103215542_03.jpg 스폴티드 우드가 된 자작나무. 오일링전에라 무늬가 덜 부각된 것이 아쉽다.


스폴티드 우드는 생나무(Green wood)를 벌채한 후 비를 맞게 두면 자연적으로 진행된다. 어떤 무늬가 만들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나무의 결 따라 분석해 가며 굳이 예상해 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듯하다. 자연의 마음을 기다려보는 것도 좋다.

자연이 주는 마음을 담아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나무를 차별화시킨다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 기준이긴 하지만 '버팀'이 아닌 '받아들임'의 완벽한 승리라 할 수 있다.


a-photograph-showcases-a-stack-of-sawn-s_ISOdHfroQ8OJKnaLA0u2ug_05S76WPhTx-azKoU3FITKw.jpeg 스폴딩 한 목재들. 현재 공방엔 목재가 많지 않아 AI로 이미지를 만들었다.(by Ideogram)


이젠 스폴팅계에도 (상처가 돈이 된다면 상처를 일부러 만드는) 학원이 등장했다.

스폴티드 우드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이젠 의도적으로 스폴팅을 한다고 한다.

나무를 쌓아두고 물을 뿌리고 비닐 막으로 덮거나 축축한 땅에 묻어 그대로 두고 기다린다. 썩음의 과정이므로 오래 두면 나무가 지나치게 약해지므로 확인해 가며 무늬를 체크한다. 상처가 고귀함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무늬를 기다리는 마음이랄까? 그 마음의 가치만큼이나 고급 가구재, 악기재 등으로 사용된다. 나무는 특별히 가리는 것 같지는 않지만 자작나무나 단풍나무, 박달나무 등이 이쁘다.







도자기 공예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

금이 가거나 깨진 도자기나 그릇 등을 옻으로 붙이고 금가루나 은가루 등을 장식하는 킨츠기(金継ぎ)가 그것이다. 킨은 ‘금(金)’이고, 츠기는 ‘이어 붙이다’는 뜻이다. 깨진 조각들을 옻칠 등으로 이어 붙이고 금가루나 은가루로 입혀 다시 붙이는 것.

15세기 일본의 8대 쇼군 아시카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애착하던 찻잔을 수리하면서 시작된 방법이라고 전해진다. 수리한 것이지만 이전의 것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로 재탄생하게 되면서 당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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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츠기로 재탄생한 도자기 그릇



이후 일본의 와비사비’(わびさび)라는 전통문화와 의미적으로 결부되면서 더 크게 유행한다. 완벽하지 않은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삶을 의미하는데, 불완전함을 뜻하는 와비(わび)와 낡음을 뜻하는 사비(さび)를 합쳐 “미완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된다.


마치 누군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그런데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더 귀하고 비싸졌다. 킨츠기도 이젠 일부러 그릇을 깨서 만들고 있고 이미 17세기부터 무사들이 자기의 잔을 일부터 깨트려 수리했다고도 하는 것을 보면, 여기에도 (상처를 일부러 만드는) 학원의 역사는 깊다고 해야 할까?




또 '고귀한 썩음’은 와인에도 있다.

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 중에 당을 인위적으로 첨가한 방식이 아닌 자연이 준 달콤한 와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추위에 포도송이가 얼면서 당도가 높아진 독일의 아이스바인(Eiswein)과 곰팡이 균에 썩어 들어가 당도가 높아진 프랑스 소테른(Sauternes) 지방의 방식이 그것이다.

얼든 썩든 포도송이가 말라비틀어진 상태에서 재탄생하는 와인으로 물론 일반 와인에 비해 많이 비싸다. 옛날 망친 포도농사로 시름이 깊어졌을 농부가 얼린 포도로, 썩은 포도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와인을 만들어보지 않았을까?


귀부와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소테른(Sauternes) 지방의 와인 이야기를 살짝 들여다보자.

‘귀부’(貴腐)는 고귀한 부패를 뜻하는데 원인은 인근 시홍(Ciron) 강과 일교차라 할 수 있다. 쌀쌀한 밤이 지나고 아침에 쨍쨍한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면 물안개가 피어오르면서 곰팡이를 만들어낸다. 이 곰팡이가 포도송이을 썩게 만들어 수분을 증발시키고 반쯤 건포도가 되면서 당도가 극대화된다. 여기서 만들어낸 대표적 와인이 유명한 샤토 디켐(Château d'Yquem)이다. 아주~~~ 많이 비싸다.

중세 독일, 주교의 허락이 있어야만 포도를 수확할 수 있을 때, 주교에게 전령을 보냈는데 허락을 받고 돌아오는데 3주나 걸렸다고 한다. 그동안 포도는 곰팡이에 대부분 썩어버린 상태. 버리기 아까워 고심 끝에 와인을 만들었는데 이게 최고급 스위트 와인이 되었다. 지금은 이런 방식의 와인을 독일에서는 슈팻레제(Spätlese)라 부르는데, ‘늦은 수확’(Late harvest)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귀부와인의 유래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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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와인을 만드는 곰팡이 핀 포도와 아이스바인을 만드는 얼린 포도 (ChatGPT 이미지)


아이스바인(Eiswein)도 독일이 시작이다. 지금은 캐나다산 아이스바인이 더 대중적이다. 기록에 따르면 1829년 독일의 도메세임(Dormesheim)에서 포도의 당도를 높이기 위해 수확을 미루다 갑자기 기온이 급강하해 서리가 내려앉고 포도송이가 꽁꽁 얼어 버렸다고 한다. 1년 농사를 망쳤다며 망연자실해진 농부들이 버릴까 돼지사료로 쓸까를 고민하다 이것도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생각하고 와인으로 만들어봤다고 전해진다.

신의 축복인지는 몰라도 ‘사랑의 묘약’이라는 별명의 최고의 스위트와인이 탄생했다. 그리고 ‘아이스바인’(Eiswein, Ice wine)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쯤 되면 예상했겠지만 와인계에도 더 이상 자연에서 곰팡이, 서리를 기다리지 않고 곰팡이균을 살포하거나, 겨울초입에 물을 뿌려 일부러 얼게 만드는 '학원'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상처를 일부러 만드는) 학원방식이 '썩음'과 '깨짐'에 들어오게 된 것은 결국은 '높아진 가치'때문일 것이다.


상처, 받아들임... 성숙의 조건


사람도 성숙을 위해 상처와 받아들임이 필요하다는 클리셰가 떠오른다. 꼰대의 말처럼 들리지만 그래도 상처를 딛거나 받아들인 사람은 이전보다 '더 비싸질 것'임은 확실해 보인다.

크든 작든 우리는 상처를 받으며 산다.

세월호, 이태원 참사 등 사회적으로 큰 비극 이후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뜻하는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가 널리 알려졌다. 너무나 큰 충격으로 인한 후유증이 오래 그리고 강하게 남아 스스로를 괴롭히는 증상이다. 깨진 도자기이고 썩어나가 중인 나무며 포도송이 상태다.

하지만 잘 회복하면 ‘외상 후 성장’(PTG, post-traumatic growth)을 하게 된다. 킨츠기처럼, 스폴티드 목재처럼, 아이스바인이나 귀부와인처럼 상처받기 이전보다 더 값진 상태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깨진 꽃병의 조각들을 다시 주워서 새로운 것을 만든다. 물론 그들이 귀하게 여기던 꽃병이 깨져서 슬프지만 예전 모양으로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제 질문은 "이것으로 다음에 무엇을 만들까?"가 된다. 아마도 그들은 다른 색깔의 조각들로 모자이크를 만들어서 기억을 보존할 수 있는 새롭고 유용한 모양을 찾을 수 있다.

- <외상 후 성장의 과학> 스티븐 조셉(Stephen Joseph)


스폴티드 우드(Spalted wood)는 원래 상태보다 나무 자체는 약해져 있다.

기능적으로는 떨어졌지만 심미적으로는 가치가 올라간다. 오늘은 스폴티드 자작나무로 플레이팅 도마를 만든다. 이전보다 약해진 상태라 샌딩도 더 수월해진 느낌이다. 받아들이는 자세가 된 것 같다고 하면 지나친 오버겠지 싶지만 조만간 상처받은 누군가와 스폴티드 목재 도마 위에 안주 올려놓고 소주한잔 해야 할 것 같다.


KakaoTalk_20240121_103215542_04.jpg 샌딩과 오일링 전의 플레이팅 도마용 자작나무. 스폴티드된 부분이 아래쪽 무늬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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