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장불입
내가 해외이주에 관한 관심을 살짝 내비치자마자 남편은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동안 자신이 계획하며 챙겨 왔던 자료들과 엑셀파일을 활짝 열어 보이며 당장이라도 떠나자는 나의 결재를 바랐겠지만 안정적 삶에 깊이 녹아든 나는 다시 한번 고민한다. 과연 외국인들 속에서 내가 살 수 있을까, 부모와 형제의 도움 없이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 아이들이 갑자기 아프면? 내가 아프면? 아니 남편이 아프면? 아이들 예방접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는지. 정말 사소한 문제부터 시작해서 점점 커져가는 걱정과 근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배낭여행을 하며 여러 나라를 자유롭게 다녔던 남편의 학창 시절과는 다르게 나의 해외여행은 가이드를 따라 구경하라면 하고 버스에 타라고 하면 타는 동남아 패키지가 다였다. 남편이 말하는 뉴질랜드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내 세상밖의 그곳은 생소함 그 자체였다. 가본 적도 없고 생전 처음 들어본 나라로 가자며 나를 설득하는 남편을 더 이상 말렸다가는 오히려 내가 오징어가 되어 바싹 마를 판이었다.
우리 가족이 뉴질랜드로 가려면 적합한 비자가 필요했다. 남편은 뉴질랜드에서 비즈니스를 좀 더 공부하기로 하고 학생비자를 받으면 아이 둘의 학비는 무료, 나는 일을 할 수 있는 비자인 워크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남편이 원하는 학교에 입학을 하려면 입학시험을 봐야 하고, 그 시험에 붙어야 입학허가가 주어진다. 입학허가가 없으면 남편은 학생비자를 받을 수도 없고, 우리 가족은 뉴질랜드에 갈 수 없다.
"당신이 뉴질랜드 학교 입학시험에 통과해서 입학허가를 받으면 그땐 정말 준비해 보자"
남편에게 조건을 제시한 이상, 나도 뉴질랜드에 대하여 하나씩 알아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꽤 먼 곳이었지만 사진으로만 봐도 깨끗한 환경과 자연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밝은 얼굴에서 자유로움이 보였다. 사실, 입학시험 통과는 이민병에 걸린 남편을 제동걸기 위한 심산이었다. 바쁜 직장생활을 마치면 칼퇴와 동시에 시작되는 정신없는 아이 둘 육아까지 더해져 남편의 입학시험 준비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기에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해외이주를 위한 준비과정의 첫 번째 관문에서 몇 번의 고배를 마셔봐야 이민병도 좀 사그라들겠지 싶었다. 남편은 시간을 더 쪼개 쓰기 시작했고, 한 번에 입학시험에 합격했고 입학증을 받아 나에게 보여줬다.
나도 남편에게 뱉은 말이 있으니 약속을 지켜야 했다. 이제 가족들에게 해외거주에 대하여 커밍아웃을 할 차례였다. 사실, 얼떨떨했다. 내 가족들에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도 망설여졌고 이 순간이 올 것이라는 상상도 한적 없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주들의 재롱 보는 재미에 매주 주말만 기다리시는 양가 부모님들께 갑자기 뉴질랜드 가서 살겠다는 말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남편과 나는 각자의 부모님을 맡기로 했다. 자녀교육을 하며 느끼는 제한적인 환경에서 벗어나 아이들이 공부 걱정보다는, 할 수 있을 때 마음껏 뛸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딸의 말에 부모님은 찬성하셨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너는? 너는 괜찮겠니?"
요즘 세상, 흔히 서른 넘어 결혼하는 시대에 스물여섯에 결혼할 남자를 처음으로 부모님께 소개하고 스물일곱 살에 결혼했다. 일 년 뒤 첫 손녀를 안겨드렸고, 2년 뒤에는 손자를 안겨드렸다. 매번 딸의 결정에 대해 믿고 응원해 주는 부모님께 다시 한번 응원을 바라는 나였다.
"아니. 엄마 나 겁나, 그런데 우리 식구라면 잘할 수 있을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