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절망 대환장 통곡시대
주말이면 평일에 못다 잔 잠을 자느라 친정에서 굼벵이처럼 움직였던 나 대신, 첫째와 둘째 아이는 친정부모님과 동생들의 몫이었다. 뉴질랜드로 가서 살겠다고 했을 때, 생 살 떼어내듯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건 부모님이 아니라 오히려 내 동생들이었다.
"애들 다 키워주니 떠나냐"
조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내 동생의 초점은 한 곳이었고 프리랜서로 비교적 시간을 자유롭게 썼던 동생은 일 외의 모든 시간에 조카들과 한 몸이었다. 어쩌면 동생의 저 말은 우리 부모님을 대신해서 시원하게 내뱉은 말일 수도 있겠다.
남편과 나는 각자의 부모님을 설득하기로 했으니 이제 시부모님의 의견은 어떠신지 궁금했다. 시어머님은 남편이 어렸을 적부터 영어교육에 관심이 많으셨고 해외여행 경험도 풍부하셔서 아들을 일찍이 유학 보내고 싶었으나 그 당시 환경이 여의치 않았다 했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비행기표 한 장 들려주고 인생경험 해보라며 시누이가 유학하고 있는 호주로 보내기도 했다. 처음엔 어리둥절하던 남편도 그 기회를 발판 삼아 배낭하나 매고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했고 다양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과 봉사활동도 하며 딱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모조리 느껴본 것 같다 했다. 스킨헤드에게 둘러싸이고 테러당해 죽을뻔한 고비도 넘겼다지만 남편에게 20대의 해외는 공포보다는 행복으로 기억되나 보다. 이렇다 보니 시어머님은 아들이 해외거주에 대한 꿈을 품고 살았다는 것을 이미 예견하고 계셨더랬다. 그래서 아들의 의견을 쉽게 수용해 주실 거라 생각했지만 우리의 생각은 또 틀렸다.
시부모님 입장에서는 이제 내 아들 하나를 보내는 것이 아니다. 아들에게 집안의 가장이라는 역할의 차이가 생겼음을 먼저 보았을 것이고 그 아들은 더 이상 스무 살 적 빈손이 아니다. 잘 나가는 외국계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승진을 거듭하며 이른 나이에 차장이 된 아들은 가장으로서 홀연히 떠나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돈 잘 벌고 강남에 집까지 마련해 줘 편히 살게 해 준 내 아들이 뭐가 부족해 마누라, 아이 둘을 데리고 해외로 나가서 살겠다는 건지 시부모님께는 청천벽력 같았고 먹구름 낀 날들이 지속되다 원망의 화살은 나에게로 향했다. 시가에서 생각하기에 도저히 내 아들은 해외 나가서 살 이유가 없다.
아이 둘을 등원시키고 오자마자 현관의 도어록에서 소리가 났다.
"삑 삑 삑 삑 띠리링"
시누이 아들을 등원시키고 시어머님이 우리 집에 들어오셨다. 자리에 앉으셔서 그동안 나에게 죄를 짓고 산 벌을 지금 당신이 한 번에 받는 거라고 하셨다. 남편의 설득이 어머님께 부족해서였나 싶어 말을 하려는 순간, 어머님은 손수건을 꺼내 통곡하셨다. 그동안 시부모와 시누이 곁에 살며 시집살이라 생각했느냐, 돈 잘 벌어다 주는 남편도 있고 친정 가까이 집도 있는데 굳이 왜 힘들게 해외로 나가 고생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하시며 '내'마음을 다시 돌리라고 하신다.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둘째 임신을 말씀드렸던 그날과 똑같다. 오늘도 역시 원망의 화살은 나에게 꽂혔고 해외 이주의 발단은 아들의 이민병이 아닌, 며느리의 시집살이 해방이라 확신하셨나 보다.
7년이다. 시부모님과 시누네와 층만 다른 한 아파트에 살면서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시가식구에 단 한 번도 싫은 내색한 적 없고 시어머님의 계모임이나 다른 스케줄로 조카의 양육까지 가끔 떠맡아도 내 새끼 둘에 조카 하나 더 돌보는 게 무슨 대수냐 싶었다. 가끔에서 자주로 횟수가 늘어난들 조카도 내 아들이다 생각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그래야 내가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원망의 화살이 나에게로 돌아올 때 잠들어있던 내 슬픈 뒤끝이 고개를 들었다. 어머님께 내 슬픈 뒤끝을 내보이고 싶진 않았지만 확실히 말하고 싶었다. '내'가 아니라 어머님 아들이라고. 당신의 아들 고집불통에 2년 넘게 시달리다 나도 이제 내 남편의 마음을 한 번쯤 들어주는 것뿐이라고.
며칠 뒤 시부모님은 손주 셋을 데리고 저녁을 먹고 오겠다고 다 데려나가셨다. 곧 시누에게 전화가 왔고 남편에게는 말하지 말고 나 혼자 집으로 오라 했다. 어차피 남편은 퇴근 전이었고 혼자 집에 있던 터라 재빠르게 시누집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고 저녁시간이니 시누이 좋아하는 떡볶이를 사러 다녀올까 생각했다. 집에 들어가니 시누는 경직된 얼굴로 우리의 해외거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본인 친구의 해외거주 경험담부터 친척들의 해외거주 이야기였다. 그들은 모두 영주권 도전에 실패하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정착하려 했던 그 나라에 학을 떼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너처럼 집에만 있는 애가 향수병이 안 생길 리 없다며 감사하게도 내 걱정까지 해줬다. 시누도 말을 하다 말고 통곡했고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시어머님과 똑같은 말을 했다.
"나는 네가 친동생 같아 잘해주고 싶어 한 행동들이 너에게 부담이 됐나 보네. 나 역시 '시'가 붙은 사람이라 네가 시집살이라 느꼈나 봐. 그래도 나가면 고생이니 뉴질랜드 가는 거 다시 생각해 봐." 퇴근하며 본인의 사촌언니와 통화를 했단다. 사촌언니는 내가 남편을 꼬셔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고 내가 너무 부럽다고 했단다. 말 잘 듣는 남편이 있으니 시댁 시집살이 다 벗어던지고 떠나려 하는 거라고.
새로운 충격이었다.
친동생 같다면서 해외이주에 관해서 나한테는 한 번도 직접 물어보지 않고 본인의 사촌언니와 이미 결론짓고 나를 입에 올려 껌처럼 씹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혹여 내가 그동안 시가의 입맛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더라도 식구로써 감싸는 게 아닌 그녀들의 핸드폰 속 티키타카의 주인공일 줄이야. 나 정말 시집살이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시가에서는 이미 시집살이에 질려 내 아들, 내 동생 꼬셔서 해외 나가 살려는 괘씸한 며느리, 올케였다.
이렇게 나에겐 슬픈 뒤끝이 하나 더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