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가 어딘데 한번 가보자

힘찬 발걸음에 그렇지 못한 마음

by march

"3년만 있다 와"


공항에서 시아버지께서는 손을 흔들다 이내 눈물을 훔치셨다. 나는 긴장해서 잔뜩 굳어 있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우리를 배웅하는 시누와 시아버지께 손을 흔들었다. 낯선 곳에 심한 불안증을 가지고 있는 나는 공항에 도착하기 전부터 내 심장이 의도치 않게 빨리 뛰어 시작부터 제동이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컸다. 하지만 그 이상을 초월하는 환경에 놓여있어서 그런지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비행기 안에서 눈은 감고 있어도 머리로는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갔고 마음은 착잡해 11시간 넘는 비행이 한숨으로 가득 찼다. 아이들은 장거리 비행이 처음이지만 모니터에 나오는 영화와 게임에 마음을 빼앗겨 비행기에서 내리기 싫다고까지 했다.


'나도 내리기 싫어'


생전 처음 와본 나라, 시가에서 세상 미움 모조리 받고 끝끝내 응원받지 못한 출국을 하며 내디딘 첫걸음.


차를 타러 가는 공항 주차장에서 느껴져야 하는 매연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들고나는 차량이 많았지만 혼잡하지 않았고 왜인지 모를 차량의 긴 줄에 누구 하나 빵빵대며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엔 미소가 만연해있고 높고 맑은 톤으로 이야기하는 말소리가 들린다. 그제야 스스로 만든 깊은 내 미간의 주름을 조금씩 편다. 고개를 들어 머리가 띵 할 만큼 숨을 들이켜다 하늘을 보니 새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참 예쁘기도 하다.


남편이 두 달 앞서 뉴질랜드로 날아가 구해놓은 우리의 렌트집을 보게 된 순간 새로운 시작이 실감됐다. 초록의 잔디가 깔려있는 전원주택이라니. 한국에서 남편에게서 받아 본 사진과 동영상보다 훨씬 근사했다. 평생 아파트에서 살아왔던 나에게 전원주택의 삶은 영 낯설다. 하지만 벌써 잔디에서 뛰고 뒹구는 아이들을 보며 기분이 좋았다가도 쯔쯔가무시를 걱정하게 되는 나는 영락없는 K-엄마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우물밖 개구리가 됐어도 여전히 걱정이 많고 아직은 미운오리새끼인 나는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밥통과 청소기를 가방에서 꺼낸다. 한국에서 가져온 내 걱정과 미련을 꺼낸다.




한국에서도 고층 아파트에서 살진 않았기에 새소리에 익숙하다. 하지만 뉴질랜드의 새소리는 상상이상이다. 낯설게 생긴 새들이 쉼 없이 노래하고 날아오고 날아간다.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누워 아침을 맞이하니 시가에서 원망을 온몸으로 막아내던 미움받던 오리가 갑자기 백조가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든다. 자면서도 얼마나 긴장을 한 건지 팔다리가 저리지만 난 이제 더 이상 한 아파트에서 마주칠 시가 식구들이 없다. 낮에 조용히 쉬며 커피타임을 가질 때 갑자기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속옷을 입으러 후다닥 방으로 뛰어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의 홀가분함은 분명 내 팔다리의 저림과 상반된 것 일터.


내가 살고 있는 집이어도 언제든 시가식구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뉴질랜드에서는 아니다. 9,946km가 떨어져서야 내 마음이 독립했다. 해외이주 커밍아웃 후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눈치 보지 않는 날들이 없었다. 남편이 먼저 뉴질랜드로 떠나 나 홀로 아이 둘 챙기며 별거생활을 했던 기간에도 '내' 마음을 돌리라는 시가는, 이제 없다. 불편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다면, 나 이제 백조가 되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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