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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ch May 16. 2023

놀이터 죽순이 엄마가 깨달은 한 가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한국에 살 때 둘째는 어린이집 하원시간에 나를 전혀 반기지 않았다. 어린이집 문 앞에서 아들의 하원요청 인터폰을 하면 둘째는 시간을 질질 끌다 내 뒤에 온 엄마들이 아이들을 모두 데려갈 때쯤 마지못해 선생님의 손을 잡고 엄마가 너무 일찍 왔다고 징징대며 나왔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야 하는 선생님이 세월아 네월아 움직이는 둘째의 행동을 보다 못해 얼른 신발을 신기고 떠밀다시피 내 앞으로 보내주셨다. 둘째는 집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로 유명했다. 집으로 곧장 가지 않는 대신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한참을 놀고 나면 해가 어둑해진다. 친구들과 친구 엄마들도 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면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야근을 하고 나와 어두운 저녁에 불이 켜진 어린이집 앞 놀이터를 지난다. 그러면 우리는 선생님들께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그제야 우리도 집으로 돌아간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비가 오지 않고는 하원 후 바로 집에 들어가는 일이 우리에게 없었다.




뉴질랜드로 오며 이제 놀이터 생활은 끝인가 싶었으나 학교에서 2분 거리인 집에 바로 들어가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비가 와도 놀이터에 있었다.


사실 학교는 아이들이 뛰고 뒹굴며 놀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초록색 잔디가 끝도 없이 이어져있고 끝에서 끝까지 술래잡기를 하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중간에 한 번씩 쉬어줘야 한다. 한국에서는 위험성에 점차 없애고 있는 정글짐도 웅장하고 몽키바도 길게 늘어져 있고 큰 놀이터가 두 개나 있다. 한편엔 모래놀이 공간도 크게 만들어져 있으니 굳이 해변이 아니더라도 사계절 내내 친구들과 성곽을 만들고 소꿉놀이를 할 수 있다. 학교에 있을 때는 줄이 길어 몇 번 탈 수 없는 짚라인도 하교해서는 줄 서지 않고 실컷 탈 수 있으니 이런 기회를 첫째와 둘째가 놓칠 리 없다.


매일 학교로 온 힘을 다해 전력질주

남편과 나는 아이들이 낯선 나라와 낯선 학교에 쉽게 적응하려면 학교와 집은 무조건 가까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학교와 집의 거리가 가까워야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불안함을 줄일 수 있고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빠르게 엄마와 아빠가 학교로 올 수 있다는 것은 아이들을 안심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등교를 거부하는 일이 없었다. 문제는 학교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학교를 잘 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학교 수업이 끝나도 학교에 머물며 아이들이 실컷 놀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나는 하교시간에 맞춰 아이들이 학교에서 간식을 먹고 놀 수 있도록 과일과 작은 봉지과자를 준비해 집을 나선다. 과자만 먹고 한두 시간을 놀기에는 아이들의 배는 쉽게 고파졌다. 내일 아침에는 오후간식으로 든든히 먹일 머핀을 구워야겠다고 생각했다.




plain flour, cake flour, bread flour, self-rasing flour? 밀가루에 종류가 있다?


한국에서 베이킹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그동안 밀가루는 부침개 만들 때 써본 게 전부다. 인터넷의 레시피는 자세했지만 내가 지금 쓰는 밀가루의 종류가 무엇인지 모를 만큼 베이킹에 무지했다. 그래도 첫 시도 치고는 그럴싸한 머핀이 만들어졌고 따끈한 머핀을 가방에 여러 개 챙겨 오늘도 아이들 학교로 향한다. 여전히 학교가 끝나고 놀이터에서 노는 우리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며 이름도 모르는 아이들을 빼놓자니 배고플 건 똑같을 것 같아서 머핀을 건넸다. 다행히 아이들은 맛있다고 잘 먹어주었고 또다시 신나게 뛰었다. 처음부터 함께 놀진 않았어도 머핀을 같이 먹었던 아이들은 첫째, 둘째와 어느새 어울려 잘 놀고 있었다. 우리가 집에 갈 때까지 같이 놀면 좋으련만 조금 있다 그 아이들은 집으로 간다. 어느새 놀이터도 조용해지고 다시 아는 친구가 없어졌지만 또 다른 친구들에게 "같이 놀래?"라는 말도 영어로 말하지 못한다.


친구와 놀 때 필요한 몇 가지 말을 가르쳐도 영어가 낯선 아이들은 금세 까먹었고 남매는 둘이 놀다 이내 투닥거리며 싸웠다. 나는 몇 개 남은 머핀을 챙겨 다른 곳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건네며 우린 새로 이사 와서 친구가 많이 없는데 저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겠냐고 물었고 구름다리, 몽키바에서 놀던 네 다섯명의 아이들은 첫째 둘째에게 우르르 달려가 어울려줬다.


이후로도 그 친구들은 학교에서 우리만 보면 달려와 인사해 주고 남매가 전혀 모를 수밖에 없는 게임을 가르쳐주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남들이 하교하는 3시부터 6시까지 학교 놀이터에서 다양한 놀이를 함께 하며 그에 맞는 규칙, 놀이영어, 스포츠 등 여러 가지를 알게 됐다. 뉴질랜드에서 어린이집, 유치원을 다닌 적이 없으니 영어 동요도 몰랐고 게임, 놀이도 몰랐다. 하지만 놀며 배우는 효과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놀이터 죽순이 엄마가 깨달은 한 가지, 놀며 배우는 게 최고다. 한국에서든 뉴질랜드에서든 세계 어느 곳에서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이들의 놀이터 뒷바라지를 위해 오늘도 놀이터에 계시는 엄마들에게 진심을 다해 응원하고 싶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보내는 그 시간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닫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오늘도 아이들이 놀이터를 가자고 한다면 물과 간식을 넉넉히 챙겨 나가시라.


오늘 날씨가 화창하다면? 놀기에 딱 좋은 날이니 무조건 나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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