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아내 개구리, 미운오리 며느리지만 엄마는 쫄 수 없지
남반구인 뉴질랜드는 한국과 반대로 여름이다. 입고 왔던 패딩점퍼를 정리하고 남편이 먼저 터를 잡고 마련해 놓은 살림들과 각종 가전의 사용법을 배운다. 아이들은 각자의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서로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건지 깔깔거리다 이내 싸운다. 남편은 일주일에 한두 번 강의를 들으러 학교에 가야 하고 그때부터 내가 아이 둘을 돌보아야 한다. 한국에서라면 5살, 7살 아이 둘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시간 보내고 즐기는 게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집 밖 문만 열어도 낯선 풍경에 난 이미 겁을 먹었다.
혹시나 동네구경하다 길을 잃으면 어쩌지? 나는 쇼핑몰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도 항상 헷갈려하고 남편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그 장소를 찾지 못해 여러 번 전화를 할 만큼 지독한 길치다. 아이들과 집 밖에 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우리 집을 못 찾아 헤매는 상상을 여러 번 했다. 주소는 이미 내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놨고 혹시나 길을 찾아야 한다면 영어로 어떻게 물어봐야 하는지 확인도 했다. 남편도 걱정이 되는지 학교 가기 전, 급하게 구글맵 사용법을 알려주지만 생소함을 한 번에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너무 굼뜨다.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엄마는 쫄 수 없다.
뉴질랜드의 첫 학기는 2월이 시작이다. 만 7세 3월에 입학하는 한국과는 다르게 뉴질랜드에서는 만 5살의 생일이 지나면 학교에 간다. 첫째는 한국에서 2년째 영어권 문화와 영어를 놀듯이 배우고 있었고 적어도 외국인을 낯설어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둘째였다. 온 세상 부끄러움을 다 가지고 태어난듯한 4살 아들이, 누나랑 떨어져 다른 기관에 있는다면 낯설어 매일 불안해하지 않을까. 어른들에게도 낯선 지구반대편 나라에서 둘째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유치원 선생님, 교실의 아이들과 유치원에서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우리가 해외이주를 1년 유예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래서 1년 뒤, 둘째는 누나와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첫째는 3학년, 둘째는 1학년으로 입학을 한다.
등교 첫날, 남매는 난생처음 입는 교복에 엉덩이 끝까지 내려오는 큰 가방을 메고 기분 좋게 집을 나선다. 엄마아빠가 학교에 데려다줄 때 둘째는 어리둥절하다가 막상 엄마랑 헤어질라치니 눈물을 찔끔 짜내고 첫째는 그동안의 영어실력을 보여주겠노라 당당히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남매를 학교에 보낸 그 순간부터 남편과 나는 조용한 집 안에서 핸드폰만 바라봤다. 혹시 아이들이 엄마 보고 싶다고 펑펑 울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려가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시간은 어찌나 안 가는지 남편과 나는 제시간에 밥도 먹지 못하고 집안을 하릴없이 서성이다 하교하는 시간보다 일찍 학교로 나섰다. 다행히 둘째의 얼굴은 밝았고 첫째의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엄마, 하나도 안 들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소위 멘붕을 겪은 얼굴이었다. 한국에서 이미 한글은 다 떼었고 영어학원을 다니며 외국인 선생님과 친구들과 말하는 게 즐겁다는 첫째였다. 그래서 뉴질랜드로 간다고 했을 때 식구 중 유일하게 기뻐하며 찬성했던 단 한 명의 존재였다. 눈물을 찔끔 흘리는 동생을 토닥이고 교실에서 무슨 일이 있을 땐 누나 반으로 찾아오라 이야기하고 오늘 친구를 많이 사귈 거라고 호기롭게 본인의 교실로 들어간 첫째였다. 이 아이는 6시간 만에 하얗고 핼쑥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선생님과 친구들의 말이 하나도 안 들린다고 울상이 됐다.
고작 7살이다. 첫술에 배부르랴 라는 한국속담을 말해줬다. 처음부터 잘할 수 없다. 첫날 아무 사고 없이 하교하며 엄마아빠에게 달려와준 너희들이 최고라 말해줬다. 쫑알쫑알 말하기를 좋아하는 남매는 학교에서 얼마나 '말'이하고 싶었을까. 눈만 똥그랗게 뜨고 여기저기 살피며 엄마아빠는 나를 데리러 도대체 언제 오는 걸까 얼마나 긴장하며 기다렸을까. 생각만 하면 눈물이 고인다. 남매는 하교하는 순간부터 다음날 등교 때까지 쉼 없이 쫑알댔다.
등교 둘째 날, Hi 말고는 사람들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멘붕에 빠진 첫째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이건 또다시 겁 많은 엄마의 생각일 뿐이었다. 잠들기 전 아이들은 한 방에서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며 심기일전을 한 건지 눈을 떠 아침을 먹자마자 빠릿빠릿 교복을 입고 양말을 신으며 빨리 학교에 가자고 엄마아빠를 재촉한다.
집에서 나와 키가 큰 나무들에 둘러싸인 정글숲 같은 길을 따라 걸으면 2분 만에 학교에 도착한다. 짧은 다리로 나를 앞서며 뛰는 남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 모습과 반대된 씩씩함에 반한다.
물론 하교할 때의 모습은 한동안 하얗게 질려 멘붕에 빠질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