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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ch May 04. 2023

감 놔라 배 놔라의 향연

남편과의 별거

해외로 떠나기 전, 1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시가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은 부모에게 해외이주라는 폭탄을 던졌고 엉뚱하게도 원망의 화살촉을 며느리에게 꽂는 시가를 차근히 설득하는 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아들 꼬셔서 해외 나가 편히 살려는 며느리고 올케라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행히 남편의 입학예정 학교에도 일 년의 기간을 뒤로 미룰 수 있었고 그동안 우리는 주변 지인들께 해외이주에 관해 알렸다.


해외이주에 관한 불협화음은 1화에서 말했던 남편과 나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해서 시가까지 이어진 것이라 지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쉬울 줄 알았다. 그러나 이게 웬걸? 그들의 사촌에 팔촌까지 카더라 통신은 끝이 없었다. 유럽은 아니어도 물가가 높아 살기 힘들 텐데 좀 더 물가가 싼 나라를 찾는 게 어떻냐, 아이들의 유학을 생각한다면 미국과 캐나다는 어떻냐, 요즘 영국도 괜찮다던데,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냐, 한인들이 좀 더 많은 나라로 가는 건 어떻겠냐, 감 놔라 배 놔라의 향연은 계속 이어졌다. 물론 우리가 떠나는 이유에 대해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이래라저래라 한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될 문제다. 하지만 피곤했다.


우리 가족의 생계부터 아이들의 적응까지 아직 시작도 못해본 해외생활 모든 것에 대해 걱정하며 겁을 줬더랬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된 큰 아이의 학업 정리에 정신없어 엄마들 모임에 참여하는 횟수도 줄다 보니 어느새 우리 가족의 해외거주 이슈는 잠잠해졌고 그제야 나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남편은 두 달 먼저 뉴질랜드로 떠나 학교에 다니며 우리가 살 집과 아이들의 학교 등록을 마쳤다. 어쩌다 보니 부부의 별거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아빠와 매일 영상통화를 하며 서로의 일상을 나누느라 울고불고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 와서 그때의 아이들 사진을 보면 너무나도 작고 어리다. 아빠 없이 엄마와 셋만 있는 두 달 동안 아빠가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리거나 나를 힘들게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신기하다.


결혼해서 첫 이사다. 첫 이사가 해외이사 일 줄이야.


신혼부터 쭉 이어온 살림들은 뉴질랜드로 가지고 가기에는 너무 많았고 8년의 세월이 그대로 느껴졌다. 큰 살림들부터 버리겠노라 호기롭게 첫 도전을 했다. 아이들이 수백 번 오르락내리락해서 낡아해 진 소파를 혼자 폐기물처리장에 질질 끌고 가다 깔려서 나 죽겠다 싶었다. 그다음부터는 친정의 도움도 받으며 하나 둘 정리하다 보니 작은 짐들이 너무 많았다. 특히나 아이들 짐은 끝도 없었다. 모두 갖고 가도 다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 책을 포기할 수 없어 제한 무게에 맞춰 포장하고 매일 우체국으로 가서 남편이 구해놓은 뉴질랜드 집으로 보냈다. 큰 살림들 정리하고 최소한의 짐만 챙긴다 다짐했기에 컨테이너, 큐브 이삿짐의 견적조차 받지 않았다. 스스로 다 해야 했다.


아이들 등교와 등원을 시키고 나면 매일 뚜벅뚜벅 걸어 우체국에 가서 제일 큰 박스와 뽁뽁이를 내가 들 수 있는 만큼 사와 하나하나 포장해서 담았다. 어느새 집안 한편에 박스가 쌓여갔고 장 볼 때 사용하는 바퀴 달린 카트에 한 박스씩 담아 여러 번 우체국으로 옮겼다. 무겁고 큰 박스는 울퉁불퉁한 길을 지날 때 카트에서 몇 번 떨어지기도 했고 오르막길에서는 나를 힘들게 했다. 우체국 직원들도 매일아침부터 시간차를 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오는 나를 신기해했다. 한 번에 차로 오면 편할 것을.. 이미 남편이 뉴질랜드로 가며 우리의 차는 팔고 없었다. 친정아버지, 시아버지, 아주버님께서 시간이 될 때마다 우체국까지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셨고 대략 스무 개의 짐을 보냈다.




집에서 한 움큼씩 빠지는 짐들을 보니 겁이 났다. 익숙한 공간이 점차 낯설게 변해지고 짐이 빠진 자리에는 내 미련이 채워졌다. 가고 싶지 않다. 무섭다. 두렵다. 하루종일 짐을 싸고 마지막 짐을 부치고 큰 아이 하교에 둘째 하원, 학원까지 보내고 다시 데려오니 애들 저녁 챙겨줄 기운도 없었다. 동네 분식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유리창 너머로 친정아빠가 보였다. 내 딸, 손주들이 보고 싶어 오셨단다. 하루종일 바빠 내 휴대폰이 꺼진 지도 몰랐다. 딸의 꺼져있는 휴대폰 때문에 걱정이 돼서 오신 건지, 정말 보고 싶어 오신 건지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아빠가 연락 없이 오셨다. 집으로 가도 아무도 없어 우리 동네 이곳저곳을 찾아다니셨단다. 겁을 잔뜩 먹어 머리가 어질 한 저녁이었는데 아빠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내 두통약이 됐다. 양손에 손자손녀 손잡고 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니 눈물도 찔끔 났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 아빠의 웃음소리와 애들의 울음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그리고 나는 남편을 보았다. 뉴질랜드에 있어야 하는 사람인데 어리둥절했다. 아빠와 남편, 갑자기 찾아와선 겁먹은 내 하루를 감싸 안았다.


그래, 가보자.

우물 안 아내 개구리에서 우물 밖 뉴질랜드 개구리가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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