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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ch Jan 09. 2024

비영주권자로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자발적 왕따가 되기로 했다 (2)

타인과의 대화에서 뉴질랜드의 다소 느린 행정처리에 당황스럽지만 점차 적응해 간다는 이야기를 하면 뉴질랜드 영주권,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사람은 꼭 이 말을 한다.  


한국물이 덜 빠졌네


뉴질랜드에서 만난 한국사람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살다 왔는지 궁금해했다. 정확히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말이다. 서울이라 말하면 그 다음은 어느 구에서 왔는지도 묻는다. 결국 강남 그리고 정확히 00동까지 대답하고 나면 곧바로 이어지는 말은 "그럼 그렇지, 한국물이 덜 빠졌네." 라며 받아친다.


우리가 만났던 사람 중에 거주 지역을 궁금해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물어봐서 답했더니 대뜸 한국물이 덜 빠졌단다.


여유로움의 미학을 가진 뉴질랜드에서 한국의 편리함을 바라면 안 된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겠지만 듣는 사람으로서 썩 좋은 표현은 아닌듯하다. 또한 타국에서 낯섦을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적절한 비유는 아니다.


뉴질랜드에 살며 우여곡절도 많고 사기를 치려 다가오는 사람도 있었기에 남편과 나는 한국인과의 만남과 교류에 관심을 두지 않았더랬다. 외로움을 느낄 새 없이 휘몰아치는 비자상황과 가족의 생계 걱정에 남편과 나는 말 잘 통하는 한인과의 친목을 다질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아이들이 학교생활에 즐거움을 느끼며 교우관계가 좋아 하루가 멀다 하고 play date, sleep over와 생일초대를 받았다. 이를 통해 로컬 친구의 엄마아빠들과 만나는 횟수가 많아져 사람을 그리워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나의 언어실력은 중학생 수준이니, 원어민처럼 유창한 영어로 그들의 대화에 100% 함께 할 수는 없는 노릇. 쉽고 천천히 말해주는 배려 깊은 대화에 낄 수는 있어도 줄임말과 슬랭이 난무하는 편한 자리에서는 집중하고 집중해도 내 막힌 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이가 한국친구를 사귀었다.



play date를 하러 우리 집에 들어올 땐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고 배꼽손을 하고 허리 굽혀 인사하는 밝고 예의 바른 아이였다. 착하고 예의 바르게 아이를 키운 부모도 궁금했다. 그러다 만날 기회가 생겼고 그 아이의 엄마와 친해졌다.


아이 친구 엄마는 10년 넘게 뉴질랜드에 살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부터 먹고살기 수월해진 지금까지의 일을 말해주었다. 서로 힘든 시기의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더욱 가까워졌고 워킹맘인 그녀를 대신해 내가 아이들의 간식을 자주 챙기고 우리 집에서 노는 날이 많아지자, 아이의 엄마는 우리 가족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남편과 나도 선물을 챙겨 초대받은 집을 방문했고 우리의 저녁식사는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술에 조금 취하자 아이친구 아빠는 나와 자신이 동갑이니 말을 놓고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자고 했다. 처음 봤지만 좋은 분위기를 깨기는 싫어 살짝 미소는 짓고 있었지만 당황스러웠다. 아이친구 엄마가 황급히 나서며 처음 봤는데 그런 건 다음에 천천히 하자며 나에게 눈을 찡끗하고 미안하다 했다.


아이친구 엄마와 나는 부엌에서 과일을 준비하려 일어났고 남편끼리도 친해지면 자주 이런 식사자리를 갖고 나중에 같이 여행을 가도 재밌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과일과 디저트를 준비해 식탁으로 가서 남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친구 아빠가 마침 남편의 일이 요즘 어떻냐고 물었고 남편은 나이가 든 건지 체력이 모자라 일이 힘에 부친다고 이야기하자,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아이친구의 아빠는 대뜸


아이친구 아빠 :(식탁에 빈 소주잔을 탁 내려놓으며)"하아~~~ 한국물이 덜 빠졌네~ 한국이랑 비교하려거든 그냥 한국 가서 편~~~ 히 사세요~" 

나 : (띠용~?? 지금 대화 맥락에 이 말이 맞아? 우리가 뭘 들은 거지?) ???

아이친구 아빠: "나 때는요~~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었어요~"

남편: 허허, 그런가요? (소주 원샷)


아이 친구 엄마는 황급히 자신의 남편 입을 막으며 많이 취한 것 같다고 이제 슬슬 일어나자며 남편을 끌어냈다. 그가 술에 취해 마음속의 말이 나온 것 일 수도 있었겠지만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도 우리 부부를 묘하게 깔아뭉개던 언사는 저녁식사 초반부터 시작됐기에 언짢았던 나의 마음을 확실히 뭉개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물었다.


나:  "내가 괜히 그 집에 가자고 해서 좋은 꼴 못 보고 주말 저녁을 망쳤네. 당신은 어때? 기분 나빴지?"

남편:  "별 신경 안 써, 처음 만난 아이친구 엄마한테 말 놓자 하고, 사람을 고작 2시간 보고 판단할 정도로 가벼운 사람이란 걸 알려줘서 오히려 고맙지. 그리고 한국물 얘기는, 나 때는 말야~로 대화를 시작하는 꼰대들이 많이 하는 말이더라."

나:  "나도 알고는 있었는데 뉴질랜드에서 직접 그 말을 들을 줄이야! 꼰대들의 유행어인가 봐"


아이친구 아빠가 큰 교훈을 줬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관계의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상대를 조금 더 편하게 느껴지게 한다. 더불어 서로의 말이 잘 통한다면 말에서 그 사람의 태도와 성격이 훨씬 더 잘 보이기 마련. 그러니 난 한국사람을 만날 때 내 행동과 언사에 더욱 조심하고 예의를 갖추게 된다.


스스로 내뱉는 '말'은, 곧 그 사람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확신하기에 내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한번 더 생각하고 친절하려, 이왕이면 따뜻하려 한다.


생각 없이 내뱉는 말과 상대를 무시하는 말로 스스로가 우월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뉴질랜드에서 한국물이 덜 빠졌다 말하는 꼰대들은 가급적 피하고 싶다.


한국물이 덜 빠졌다 말하는 꼰대들 보셔요.

빨래할때마다 생각나는 “한국물이 덜 빠졌다”는 말.

한국물? 찌든 때 빼듯 빨래해야 할 구정물이 아니잖아요.

한국의 편리함과 과거의 편안함을 회상하는 게 나쁜가요.


그래요, 한국물 좀 덜 빠지면 어때요.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며 살겠다고 온 이들에게 한국물이 덜 빠졌다 쥐어박는 소리는 이제 멈춰주세요.


그래, 당신은 과거에 그랬구나. 지금 힘들 수 있지.

생경해도 지금을 잘 견디면 분명 좋은 날이 올 거다.

지금처럼 열심히 살자.


이렇게 남에게 무례하지 않고 응원하는 방법도 있답니다.


쓰다 보니 궁금하다.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이민자분들께서는 “한국물이 덜 빠졌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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