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왕따가 되기로 했다 (1)
나는 어릴 적부터 손으로 무엇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생활에는 종이 접기에 마음을 빼앗겨 관련 자격증 6개를 순식간에 따기도 했고 이를 통해 강사활동을 하며 다른 친구들보다 좀 더 편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기성품을 사더라도 조금이라도 불편하다면 내가 원하는 데로 고쳐 사용해 한결 편해지니 나의 손재주는 나를 더 편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친구가 많아지며 집으로 놀러 오는 친구들도 많아졌다. 놀이터에서 놀 때는 아는 친구도 많으니 준비해 나가는 간식도 부족했고 친구들에게 똑같이 나누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마음도 충족해주고 싶어 매일 베이킹을 하다 보니 실력도 늘었다.
아침을 먹으며 오후간식으로 쫀득한 떡이 먹고 싶다는 아들을 위해 찰떡은 아니지만 집에서 찹쌀머핀을 구워 하나씩 먹기 좋게 포장을 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간식을 마음에 들어 했고 친구들도 처음 먹어보는 쫄깃함을 신기해하며 이에 달라붙는 식감을 재밌어했다.
저 멀리서 아는 한국엄마들이 보였다. 놀이터에서 가끔 마주칠 때마다 안부를 묻는 엄마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나이가 많고 15년 전에 영주권을 받았다. 마음이 편해지니 뉴질랜드에서 늦둥이가 생긴 거라 했다. 그 늦둥이가 우리 집 둘째와 나이가 같다.
그 집 엄마는 내가 만든 간식을 건네받으며
"매일 뭐 이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나와~ 자기는 이런 게 귀찮지도 않은가 봐? 대단하다 정말! 고마워 잘 먹을게"
마침 첫째가 모래놀이장에서 일회용 그릇에 모래를 담고 그 위를 꽃으로 장식해 케이크이라고 나에게 보여주러 왔다.
나는 딸이 만든 케이크를 보고
"너~무 예쁘다! 모래로 만들어도 이렇게 맛있어 보일 수 있구나! 꽃장식도 정말 잘 어울려! 우리 다음에 진짜 베이킹으로 케이크를 만들어보자! 잊지 않게 엄마가 사진 찍어둘게!"
내 옆으로 다가온 둘째 친구 엄마는 큰아이가 만든 모래케이크를 보며
아이 사진을 찍어주다 말고 손재주에 고생을 갖다 붙이는 그 엄마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가만있기에는 화가 차올라 나도 갑작스럽게 뾰족한 말이 튀어나갔다.
"아이가 만든 작품에 엄청난 의미부여를 하시네요. 꼰대 그 이상의 말씀을 하시니 너무 옛날사람 같아요! 아! 나이가 좀 있으시댔죠? 아니지~ 나이 라고 하면 어른한테 버릇없는 거죠? 연세요, 연세가 좀 많으시죠? 요즘은 손재주도 능력이에요^^ 고생은 무슨~"
내 옆에서 빵을 먹고 있던 또 다른 한국 엄마가 말을 거든다.
"그래요. 세상에 조선시대 사람도 아니고 무슨 애가 만들어온 모래작품에 고생이네 마네 그런 말을 하셔요, 꼼꼼하게 잘도 만들었네! 이리 와봐~~ 아줌마도 사진 한 장 찍어두자! 너무 예쁘다!"
옆에 있던 다른 엄마까지 거들어 아이에게 고생이니 뭐니 하는 그녀의 말에 일침을 가하니 머쓱해진 그 엄마는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우리 셋은 지나치다 눈이 마주치면 인사만 하는 사이였다. 이민 새내기 다른 엄마들한테도 이민 온 지 얼마 됐는지 묻고 자신은 영주권자라 말하며 과거의 비영주권 시절 고생을 구구절절 말했다 한다. 그 엄마는 이미 다른 이민 새내기 엄마들에게도 꼰대짓과 비영주권자 엄마들을 깔보기로 유명했다.
영주권자라고 으스대며 생각 없이 뱉는 말로 무례함을 자신을 솔직한 성격이라 포장해서 퉁쳐버리는 그녀가 떠나고 내 딸의 모래작품을 칭찬했던 엄마와 아무 말 없이 놀이터를 바라보다 남겨진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들은 말은 그냥 잊으라고 영주권이 벼슬인 줄 알고 쓸데없는 말들을 하는 사람이 많다했다.
사실이다.
뉴질랜드의 한국 이민사회는 작다. 좁다. 어떻게든 다 연결되게 되어있다. 그들에게 '영주권'은 벼슬이므로 어떻게든 뉴질랜드에 정착해 살고자 하는 비영주권자는 이미 비자상황이 안정된 영주권자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비록 그들이 당장 나에게 어떠한 도움도 어떠한 경제적 이득이 되지 않는다 해도 '나중에', '혹시 모르니'라는 생각에 우리에게 생채기를 내고 무례하게 군다 해도 비영주권자는 맞대응하지 않는다.
무례한 꼰대와 비영주권자를 깔보는 아이 친구의 엄마가 내가 일하는 사업체의 지인이 될 수도 있고 사장이 될 수 있다.
세상 어디에도 무례한 꼰대는 있기 마련.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은 나는 자발적 왕따가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