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
뉴질랜드에 살고 있어도 여전히 나의 카카오톡은 자주 울린다. 한국에서 같은 어린이집, 초등학교를 다녔던 아이 친구들의 엄마들인데 아이가 고학년으로 가기 전, 영어공부를 어떻게 하는지에 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한 연락이다.
단체방에 13명의 엄마들은 영어교육에 관한 궁금증을 매번 개별적으로 나에게 '따로' 물어온다. 한국에 있을 때도 학원의 정보는 공유하되, 개인이 직접 모신 과외 선생님의 정보는 공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뉴질랜드로 와 처음 알게 되었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브런치 카페에서 모임을 하고 서로의 남편까지도 잘 알아 해외에 함께 놀러 다녔던 그녀들이, 자식교육에 관해서는 풀어놓지 않는 비밀도 있었다는 것을 뉴질랜드로 떠나온 나에게는 이제야 공개한다. 하지만 나도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알려주지 않았겠지.
‘너만 알고 있어’라고 말한 그녀들에게 나도 영어교육에 관한 새로운 비법을 알려주면 좋으련만 그녀들이 뉴질랜드에 오지 않는 이상 효력 없는 대답일 뿐, 내가 줄 수 있는 비밀은 없다. 한 달이 지나기 무섭게 내 아이들의 영어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체크하고 싶은 그녀들의 카톡에 내 대답은 늘 같아 머쓱할 뿐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뉴질랜드 생활의 안부를 묻고는 이내 본론으로 들어간다.
"애들 영어 잘해?"
"좋아지고 있어요. 그래도 아직 멀었죠."
"아니, 왜~ 뉴질랜드 간지 일 년 넘었잖아?"
"애기가 태어나도 한국말하는데 한참 걸리잖아요. 일 년 만에 어떻게 영어를 잘하겠어요^^"
"그럼 뭐라도 시켜야 하는 거 아냐?"
늘 이런 식의 대화지만 같이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기에 ‘해외에 나가살면 영어를 진짜 잘할까' 또는 '우리 애 유학 보내면 1년 만에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라는 엄마들의 궁금한 마음도 이해하기에 그만 좀 물어보란 매정한 대답은 하지 않는다.
첫째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뉴질랜드로 왔다. 강남 한복판에 살며 7세 때 시작한 영어 사교육은 다른 아이들의 비해 다소 늦은 감은 있었지만 멀미가 심한 큰 아이가 영어 학원을 가기 위해 셔틀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것을 보는 엄마의 입장에서 과연 잘하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주변의 어린이집 친구 엄마들은 5세가 지나도록 영어학원을 보내지 않는 나에게 과외나, 화상영어와 같은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이 아닌지 물어오곤 했다. 두 살 터울의 둘째까지 돌보고 있는 전업주부로서 아무것도 시키지 않는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6세 때 첫째의 어린이집에서 월 3만 원 정도의 금액을 내면 외부에서 선생님이 오셔서 영어를 가르쳐줬는데 첫째가 받는 영어수업은 어린이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 20분이 다였다.
내가 교과목 사교육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가 관련된 학원에 큰 관심이 없었다. 엄마들이 좋다고 하는 유명한 학원들은 자체 학원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거리였다. 우리 집과 친정을 오가는 20분에도 차가 막힐 때면 간혹 토 할거 같다고 꾸엑 거리던 아이라서 차가 한참 막히는 시간에 아이를 셔틀버스에 태우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아이가 관심 있어하는 부분에는 적극 지원했다. 종이접기, 클레이, 미술, 태권도, 발레, 피아노와 같은 예체능에 관한 것들이었다.
주변 지인들에게 뉴질랜드로 간다 했을 때 아이들을 너무 준비 없이 보내는 것 아니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영어유치원을 나오지도, 영어학원을 오래 다니지도 않은 아이의 적응을 걱정했다.
2년간 영어 사교육을 받은 첫째는 자신감에 가득 차 뉴질랜드의 학교 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대망의 첫 등교를 했지만 하루종일 자신에게 말을 거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창백한 얼굴로 하교했다. 누구보다 말하기를 즐거워하는 아이인데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전달하지 못하니 답답해 죽겠다고 했다.
아이들이 하교 후, 학교 놀이터와 필드에서 놀다 보면 갑자기 어디에선가 학교 학생들과 유니폼을 맞춰 입은 어른 몇 명이 나와 공놀이와 술래잡기 비슷한 놀이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아이들이 점차 학교에 대한 많은 것을 알게 되며 엄마의 궁금증도 풀어주었다. 그것은 학교에 있는 방과 후 프로그램으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사설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은 학교의 돌봄 교실을 이용하려면 맞벌이라 가능한 일인데 뉴질랜드에서는 사설업체가 진행하기에 돈만 내면 원하는 아이들은 방과 후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직원인 선생님과 재밌게 노는 학원인 셈.
유니폼을 맞춰 입은 선생님들이 어찌나 친절한지 우리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으면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있는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할 때 같이 껴서 놀기도 하고 뉴질랜드의 놀이방법을 전혀 모르는 우리 아이들이 게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방법도 잘 가르쳐주었다.
선생님들이 입고 있는 티셔츠 뒤에 적힌 영어가 업체의 이름이겠거니 싶어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와 저녁에 검색을 했다. 몇 개월간 학교 놀이터에서 방과 후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들을 봐왔던 터라 내가 아이와 함께 놀아주는 것보다 뉴질랜드 초등학생이 즐기는 놀이와 게임을 선생님과 친구들이 함께 하는 것이 더 즐거울 것 같았다. 다양한 공으로 신나게 놀아주는 남자 선생님도 있으니 아들의 샘솟는 에너지 방전에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큰아이의 성격 상 20대의 선생님을 졸졸 따라다니며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로는 딱일 듯싶었다.
우리는 뉴질랜드의 시민권자도, 영주권자도, 그렇다고 풀타임 일을 하는 부모도 아니었기에 뉴질랜드에서 지원하는 보조금을 받지 않아 하루에 20불씩 지불해야 했다. 아이가 둘이니 하루에 40불. 한 주에 200불. 1 텀이 10주니까 2,000불. 한국 돈으로는 160만 원이다.
아이들은 주 5일, 3시부터 6시까지 학교 방과 후 프로그램에서 뉴질랜드 초등학교 아이들이 즐겨하는 여러 가지 놀이와 보드게임 등을 배워왔고 나와 남편은 아이들에게 그대로 배워 주말이면 마당에 나가 다양한 보드게임을 했다. 아이들은 뉴질랜드에서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기에 학교 친구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와 놀이를 전혀 몰랐다. 하지만 방과 후 프로그램에 다닌 후로 친구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와 놀이를 섭렵해 친구들과의 간극 없이 더 잘 어울리게 됐다. 또한 방과 후에 다니는 언니 오빠, 누나 형들을 알게 되며 더 많이 자신을 알리게 되는 기회가 생겼고 학교의 운동회와 같은 이벤트 데이에는 그 빛을 발했다.
Cross country라고 하는 달리기 대회, Athletics day라고 부르는 운동회에서 우리 아이들이 출발선에 서면 방과 후 프로그램에서 매일 만나는 선후배 아이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 남매의 이름을 힘차게 부르며 손뼉 치고 응원했고 우리 아이들은 수줍어했지만 열심히 달려 남매가 나란히 1, 2등의 메달을 목에 걸었다.
우리가 아이들을 보낸 primary school에 단기 유학생은 없었지만 한국 학생들은 있었기에 이벤트 데이에 한국 부모들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종종 있었다. 아이들이 뉴질랜드 태생인지, 어디 데이케어를 졸업했는지, 어떻게 주변 선후배의 응원을 받게 된 건지 등 아이들의 영어실력과 더불어 좋은 교우관계에 관해서 신기해하며 물었다.
나: "저희 아이들은 작년에 입학했어요. 학교 After school program을 보냈더니 같은 반이 아니어도 언니 오빠들과 많이 놀 수 있어 친해진 것 같아요."
다른 엄마 1: "아, 엄마가 직장 다니세요?"
나: "아니요, 애들 더 잘 놀 수 있게 하려고 3시부터 6시까지 방과 후 프로그램에 보내는 거예요."
다른 엄마 2: "그럼 애들 영어학원은 다녀요?"
나: "아니요, 그냥 여기 학교 After school만 보내요"
다른 엄마 1: "한국에서는 직장 다니는 엄마들이 학원 뺑뺑이 아니면 돌봄 교실을 보내잖아요. 여기서도 After school은 부모 직장 때문에 보내는 거라 생각했는데, 노는 엄마도 보내는 건 처음 봤어요."
다른 엄마 2: "저도요. 엄마가 3시에 픽업 못하는, 관리 안 되는 애들이 다니는거라 생각했어요."
???
아이의 영어실력과 좋은 교우관계의 비결을 묻길래 답했다가 졸지에 우리 아이들은 관리 안 되는 애들, 나는 노는 엄마 취급을 당했다. 필터링 없이 말하는 것인지, 무례한 것인지 도통 감 잡을 수 없는 처음 본 엄마들이지만 다행히 자주 마주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녀들은 노는 엄마지만 관리를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직접 라이딩하며 학원에 보낼 것이고 나는 한동안 아이들이 원하는 After school에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몇 개월간 After school 프로그램을 유심히 지켜봤고 직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우리 아이들이 뉴질랜드 생활에 좀 더 수월하게 융화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졌다. 사교육의 좋고 나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그녀들은 어떤 확신 때문에 학원을 보내는 것이 좀 더 관리된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영어는 의사소통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니 빨리 익힌다면 아이들이 생활하는데 겪을 수 있는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 문화를 모르고, 놀이를 모르면 의사소통이 된다 하더라도 무리에 쉽게 들어갈 수 없다. 이미 데이케어센터에서부터 삼삼오오 무리 지어진 친구들 사이에서 잘 지내려면 그들의 문화와 놀이를 먼저 익히고 더불어 영어를 할 수 있어야 아이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무리에 융화될 수 있다.
뉴질랜드에서 놀이터 죽순이로 살며 직접 보고 깨달은 엄마가 다시 한번 확신한다.
After school에서 아이들과 선생님이 상호작용하는 주 무대는 학교이고, 아이들에게 더없이 안전한 공간이다. 3시간 내내 다양한 놀이와 뉴질랜드스러운 간식을 제공하는 이곳은 아이들이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러므로 After school은 언어와 문화, 친목이 융화되는 최고의 '학원(學院)'이다.
놀이를 가르쳐주는 아이도 배우는 아이도 의사소통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그러니 무조건 영어를 강조하기 이전에 문화와 놀이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길 바란다.
뉴질랜드의 After school을 무시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