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조금 덜 외로웠을까
남편은 한국의 외국계 기업에서 10년 일하며 차장의 직급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는 타인에게 낯을 많이 가리지만 일에 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일 년에 한 번 회사 사람들과 그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연말파티에서 윗분들이 남편을 대하는 모습은 참으로 정중했고 그의 아내인 내 눈을 맞추며 남편이 이루어낸 성과와 인간성에 대한 칭찬을 잊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는 나는 꼭 학교 학생 상담을 간 엄마처럼 내 곁에 든든하게 자리한 남편을 바라보며 흐뭇했고 또한 자랑스러웠다. 그의 후배들이 말하는 남편은 날카로운 분석을 무기로 상대방의 설득에 능하며 자신의 요구조건을 듣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타고난 협상꾼이라 했다. 더불어 자신들의 롤모델이라 했다.
하지만 남편은 하루하루 자신의 인생 배터리가 소진되는 생활에 숨구멍을 찾고 있었다.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 그보다 조금 덜 버는 아내가 경단녀가 되었으니 고맙고 미안했다. 또한 외벌이 가장으로서 아이 둘과 전업주부인 아내를 전적으로 책임지니 경제적인 부담은 늘 따라다녔다. 다행히 우리는 부모님께서 마련해 주신 집이 있어 다른 외벌이 가정보다는 형편이 나았지만 그래도 아이 둘을 키우며 여러 가지 교육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넉넉하단 생각이 한 달도 들어본 적 없으니 큰 빚만 없었지 살기 팍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매일 아침 미세먼지 어플을 확인하며 마스크를 챙기는 일상이 계속되었고 뿌연 황사와 미세먼지 속에서 외출이 제한되고 놀이터에서 놀 수 없는 날들이 많아지자 아이들은 주말에 키즈카페에서 두 시간 노는 게 가장 큰 행복이 되어버렸다.
군대에서 폐를 다친 남편은 살기 위해 누구보다 깨끗한 공기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먼지가 많은 곳에서 그는 숨쉬기가 힘들어져 숨소리부터 달라진다. 집에서는 공기청정기 두 대가 매일 쉬지 않고 돌아갔고 겨우 베란다 하나 달린 집에는 아이들의 장난감과 널어놓은 빨래로 꽉 차 일상의 답답함에 무게를 더했다.
그의 이민병은 단순히 20대 때 해외살이 그리움의 연장선이 아니었다. 가장으로서 짊어진 삶의 번아웃에 대한 회복과 미세먼지 속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폐로 편히 숨 쉬고 살기 위한 환경을 찾고 싶은 간절함, 이 모든 것이 합쳐진 것이었다.
나는 남편의 이민병을 그저 젊은 시절 좋은 기억에 대한 배부른 그리움이라 치부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외국에 나가서 살아본 남편이 심심한 일상에서 겪는 해외살이의 향수병이라고 삶의 번아웃을 알아주지 못한 채 그를 애써 한 자리에 묶어두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전화기의 벨소리도 듣기 싫어 퇴근하고는 당연하게 휴대폰을 꺼두고, 타인과 나누는 대화도 모두 끊은 채로 자꾸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남편을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타이틀로 내가 억지로 끄집어냈는지도 모르겠다.
탈출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남편의 이민병은 한국이 지겹고 싫어 떠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Leave는 그에게도 두려웠다. 정말 말 그대로, 가지고 있는 숨통으로 편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 위해 찾은, 자신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뉴질랜드로 거처를 옮겼을 뿐 남편은 인생의 번아웃을 가만히 되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뉴질랜드로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자의 문제가 생겨 다니던 학교를 하루아침에 못 나가게 되었고 비자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가족 모두 뉴질랜드를 떠나야 했으니 한국을 떠나온 지 두 달 만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과 마음은 쉴틈이 없었다. 자신의 바람으로 온 가족을 모두 낯선 나라에 묶어두었다는 생각에 그의 심적 부담은 한국에서보다 오히려 더 커져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많았다.
남편은 열심히 살았다. 우리의 비자가 하루아침 사라졌을 때도, 차가 사라졌을 때도, 갑작스레 이사통보를 받았을 때도. 좀 더 편안히 숨 쉬며 살고자 했을 뿐인데 뉴질랜드라는 나라는 남편을 밀어내기라도 하는 듯 자꾸 여기저기서 문제를 만들어 우리 앞에 던져뒀다. 남편은 홀로 깜깜한 방탈출 게임방에 들어간 듯 뉴질랜드에서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풀 단서를 찾기 위해 애썼고 제한시간이 가까워올 때마다 마음을 졸였다.
뉴질랜드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둘씩 터지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숨 한번 돌릴 틈 없이 이제는 경제적인 문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빠른 취업이 우선이지만 아직 학생의 신분에서 정규직을 찾을 수 없어 남편은 학교를 가지 않는 날에 택배일을 했다.
한국에서 쾌적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잠시 휴식이 필요할 때는 직원 휴게실로 자리를 옮겨 커피 한잔을 마시고 마사지 의자에 앉아 과부하된 몸과 머리를 진정시켰었다.
그랬던 남편은 이제 목장갑을 끼고 무거운 박스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상하차 알바를 하고 일당을 받는다. 안 하던 일을 하는 것이기에 힘들 뿐 자신의 처지가 나쁜 것 같진 않다고 했다. 공부하며 돈도 벌 수 있으니 다행이라 했다.
Leave가 아닌 Live를 위해 이민을 선택한 남편, 이민병이라 치부했던 아내의 말에 얼마나 서운하고 속상했을까. 나는 왜 그때 살고자 했던 당신의 선택을 외롭게 했을까. 이민의 총대를 멘 당신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잘못된 선택을 한 듯 눈치주며 살 얼음판을 걷게 했을까.
한국의 삶 보다 더 힘든 나날이 계속되어 뉴질랜드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첫 해에 홀로 넘어지고 무너졌던 당신에게 이제야 말한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당신은 조금 덜 외로웠겠지. 우둔한 아내가 이제야 알게 된 당신의 마음에 힘을 실을 테니 앞으로 우리의 살아갈 내일이 밝게 빛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