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50대 소녀와의 만남
생각해보면 혼자 비행기를 타는 게 처음도 아닌데
그날은 유난히 긴장됐다.
내 옆에는 누가 탈까?
짧은 시간도 아니고 13시간을 넘게 가야 하는데
‘너무 까탈스러운 사람만 아니면 좋겠다’ 생각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탈 때마다
눈은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뒤통수의 신경은 온통 내 옆좌석을 향했다.
드디어, 내 옆에 탈 사람이 도착했다.
배우 조민수를 닮았다고 해야 하나?
도시적인 이목구비에 칼 단발의 여자
스타일리시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50대 중년이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아주머니가 “안녕하세요”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는 그녀!
덕분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편안해졌고
오늘 비행시간이 덜 긴장되겠구나 싶었다.
이코노미 스마티움 좌석은 처음 타봐서 잘 몰랐는데
사람들이 구매할 때
가운데 좌석은 잘 안 고르는 것 같았다.
암묵적인 룰이라고 해야 하나?
대부분의 스마트 좌석들이 3개의 붙어있는 좌석 중
가운데 좌석을 사이에 두고
양 사이드 자리를 먼저 선택하는 듯했다.
사람이 많으면 3개의 좌석이 다 꽉 찼겠지만
만석이 아니었던 덕분에
가운데 자리는 공석으로 가게 되었고
양쪽에 앉은 사람들이 좀 더 여유 있게 갈 수 있었다.
나와 동안 아주머니 역시
좌석 한 칸의 거리를 두고 앉았는데
그게 내 마음에도 딱 그 정도의 여유가 생겼던 것 같다.
너무 비좁지 않은 한 칸의 여유!
그 틈으로 ‘추억’이 생길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
첫 기내식이 나올 때였다.
우리가 세 번째 줄에 있다 보니
카트가 나오자마자 보였다.
첫 줄, 둘째 줄 사람들이 하나둘 메뉴를 고르는데
동안 아주머니가 신이 나서 카트를 보며 메뉴를 듣더니
“쌈밥이랑 양식 있대~ 뭐 먹을래요?” 물었다.
그 한마디에 남아있던 경계마저도 사르르 녹았던 거 같다.
“저... 저는 쌈밥”이라고 답하자
“그치? 쌈밥이 낫지?” 하더니
승무원에게 나란히 쌈밥을 받아 나눠주었다.
불필요한 대화 없이 식사 메뉴를 묻는 게 전부였지만
그냥 그 한마디 한마디가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한참을 비행하다가 아주머니와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나처럼 혼자 여행을 가는 건가 싶었는데
복도를 두고 옆자리에 앉은 언니와 동행이라고 했다.
그 언니와의 인연도 참 대단하다 싶었는데...
몇 년 전, 서유럽 여행을 갔다가 만나서 인연이 되었고
그때의 인연이 계기가 되어 연락하고 지내다가
이번엔 동유럽 여행을 함께 가는 거라고 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과
이토록 오랜 세월 연락이 지속되고
또 함께 여행을 간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가 싶었다.
우리 엄마도 이렇게 여행을 다닐 수 있도록
든든하게 지원을 해드려야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아주머니가 그 언니와 다시 여행을 가기로 한 건 올해가 아니라고 한다.
작년에 가기로 했었는데, 그 사이 아주머니의 인생을 흔드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아주머니의 밝은 모습과 성격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그늘이었다.
알고 보니, 급작스럽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됐다고 했다.
그 일로 아주머니는 시름시름 앓았고,
믿고 의지했던 ‘엄마’가 곁에 없다는 게 믿을 수 없어서
의료진의 도움도 받아야 했을 정도로 식음을 전폐하고 지냈다고 했다.
50대인 아주머니의 나이를 생각하면 어머니는 70대...
요즘 같은 시대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거라서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힘든 시기를 지나,
약 한 달 전,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단다.
남편과 딸의 응원을 받고,
함께 떠나기로 한 언니의 응원을 받고
힘겹게 용기내어 다시 떠나는 유럽 여행
그 얘기를 듣는데, 마음이 너무 먹먹했다.
내가 아주머니와 같은 입장이라면 얼마나 마음이 무너졌었을까?
늘 일상을 함께 하던 엄마가 갑자기 곁에 없다면, 얼마나 보고 싶을까?
하지만, 엄마가 딸의 힘든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엄마의 얘기를 하는 아주머니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이제 엄마를 놓아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힘을 내보려고요”
아주머니의 그 마음이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렸다.
한 편으로는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이 노력하는 모습에 있는 힘껏 응원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도 딸이 더 이상 아파하지 않기를 원하실 거예요,
그러니 여행을 온몸과 마음으로 즐기고 오셔요”
그 후로도 아주머니와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이야기 하나 하나가 흥미로웠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걱정이 되지 않을 정도로
대화가 잘 통했다.
비행기 메이트를 잘 만난 덕분에
다른 때보다 길었던 13시간 30분 간의 비행이
지루하지 않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체코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 출입구 통로에서
아주머니와 그 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요 앞까지라도 우리 같이 가요”
하면서 내 팔짱을 끼고 셋이 공항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괜히 든든했고
짧은 인연이었지만, 헤어짐은 그 이상으로 아쉬웠다.
공항 게이트를 향해 나가는 동안,
내 뒷모습을 보고 손을 흔들어주던 아주머니와 언니
두 분 덕분에 마음이 참 따뜻해졌고
나 또한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머니가 처음 건넨 말
‘안녕하세요’ 그 한마디가 주는 힘이 컸던 거 같다.
인연의 시작이 된 한 마디였고
거기에 더해,
경계를 녹여준 말 한마디는 ‘뭐 먹을래요?’였는데
초면에 환하게 웃으며 건넨 그 말이
내 마음을 참 편안하게 해줬던 것 같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웃으며 인사를 했던 적이 있었나?
처음 만났을 때, 경계 없이 사람을 편안하게 대했던 적이 있었나?
아주머니와 만남은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던 거 같다.
이번 여행에서 나도 누군가를 만난다면,
경계만 할 게 아니라 따뜻하게 대해줘야지 싶었다.
이들 덕분에 나의 여행도 온기가 충만해졌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