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강나무 Apr 12. 2023

나의 19호실을 찾아서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는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각기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세 명의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2003년 우리나라에 개봉되었을 당시 평론가들 사이에서 이 영화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거웠던 기억이 있다.


이 영화는 1923년과 1951년, 2001년을 살고 있는 세 여성의 하루를 보여준다. 과거이든 현재이든 특정한 상황에 갇힌 여성의 심리 묘사를 통해 그들이 자신들을 속박하는 삶의 틀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완벽해 보이는 그들의 현실 뒤에 공허와 좌절로 인한 상처가 숨겨져 있다. 세 명의 여성 인물 중에서 ‘로라 브라운’의 얼굴은 사진처럼 내 가슴에 박혀 있다. 1950년대 화려한 색감의 배경과 반대로 과묵하고 속을 보여주지 않는 로라는 결혼으로 브라운 부인(Mrs Brown)이 되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 갈색은 가난, 여자, 출산, 죽음을 나타내는 색이었다. 나태를 상징하기도 했는데 특히 기독교에서 나태는 일곱 개의 죄악 중 하나로 여긴다. 로라 브라운의 생활이 경제적 가난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남편이나 이웃 여성들과의 정서적 소원 상태는 그의 정서적, 사회적 욕구 결핍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갈색이 상징하는 이미지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그는 여성 모두의 모습(everybody)이기도 하고 그렇기에 분간할 수 없는 아무도 아닌(nobody)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남편의 생일날, 실패한 생일 케이크는 가부장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좌절하는 로라의 모습을 보여 준다. 결혼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자신의 대사와 행위를 완성하지 못한 배우가 된 로라는 호텔방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자살을 꿈꾼다.


이 영화뿐만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 도리스 레싱 등 여러 작가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하는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한동안 나도 혼자만의 공간을 소망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어려 꿈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3년 전에 드디어 원룸을 세냈다. 온전히 나만의 공간에서 나를 즐길 수 있다는 기대에 여러 가지를 계획했다. 작은 방 하나는 온 세상이 되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남편의 출근 시간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방 역시 현실이 되어 갔다. 청소와 조리 시간이 필요해지고 오후 4시만 되면 마음이 바빠졌다. 집으로 돌아가 다시 청소와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3개월 동안의 이중생활은 나를 위한 의미있는 시간이 되기는커녕 나를 더욱 시간에 묶어 놓기만 했다. 나만의 방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원룸의 한쪽 벽에 3단 선반을 세워 놓고 좋아하는 책들을 꽂아 놓고 '내 방을' 장식했었다.  오늘 거실 책장 한켠에 다시 옮겨놓은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그 책을 읽고 느꼈던 공포가 되살아났다.


‘내 여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위장하기를 그만두고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했다. 소망이 좌절되자 희망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강렬한 의지로 그는 햇볕이 잘 내리쬐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나무가 된다. 가을이 되어 나무는 열매를 맺었다. 여자의 남편은 열매를 받아서 내년에 화분에 심을 계획을 한다. 나는 여기서 몸서리가 쳐졌다. 나무가 되어서도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남편이 주는 물에 의지해야 살 수 있는 여자는, 시대를 넘어서도 장소와 특정 시간에 갇힌 여성의 운명을 보여 준다.


몽테뉴는 걷지 않으면 사유는 잠들어 버린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19호실’은 공간적인 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의 아내나 누구의 엄마라는 틀에서 벗어나 내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나의 19호실을 만들고 그 방을 넓혀 가기 위해 나는 잠들지 않고 열심히 걸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혜석의 「경희」에 나타난 근대여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