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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와 Mar 08. 2024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이제 다시 詩作입니다>

百八煩惱 백팔번뇌

靑蛙 朴秀경 청와 박수경
 
眼根愛物質 안근애물질
生死之因果 생사지인과
愛憎爲苦原 증위고원
耳鼻舌身意 이비설신의
六根皆如是 육근개여시
無常勿執着 무상물집착
三世諸因緣 삼세제인연
百八煩惱兮 백팔번뇌혜
 
백팔번뇌
 
눈은 물질을 사랑하사
생사의 원인이 되고
생사의 결과가 되니
애증이 괴로움 원인이 되어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모두 이와 같이
덧없고 부질없거늘
삼세제불 인연들이
백팔번뇌
(박수경 작사, 작곡, 1982년)

대학시절의 제 애창곡이 최현군의 <백팔번뇌>였습니다. 노래 앞에 제가 지은 구절을 얹어서 부르곤 했었지요.
 
염주 한 알 생의 번뇌, 염주 두 알 사의 번뇌
백팔염주 마디마다 님의 모습 담겼으니
낭랑한 목탁소리 님에게 드리올 제
풍경소리 허공에 울려퍼지네  
 
산사에 홀로 앉아 백팔번뇌 잊으려고
두 손을 합장하고 두 눈을 꼭 감아도
속세에 묻힌 정을 어디에서 풀겠느냐
달빛만이 서럽게 나를 감싸네  
 
구름 가듯 세월 가듯 천년 겁이 흘러가면
너도 가고 나도 가련만
님의 뜻을 알 길 없어 이리저리 헤매이다
이 밤도 지새는구나.
(최현군 작사, 작곡 1978년)

[청와 론]
 
1. 신명활동과 자잘한 번뇌
 
사람의 신명(생명)활동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1) 신체활동은 감각을 느끼고 생명활동을 하는 물리적 자신(自身)이 합니다.
2) 정신활동은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가진 심리적 자기(自己)가 합니다.
3) 의식활동은 언어로써 사고하고 추리하는 논리적 자아(自我)가 합니다.
 
자신은 생로병사로 인해 번뇌를 갖게 됩니다. 건강한 자신이든 병들고 노쇄한 자신이든 살아있다는 자체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번뇌를 갖게 합니다.
 
자기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惡)으로 인해 번뇌를 갖게 됩니다. 싫든 좋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몸에 배는 것(내면화, 습, 업)이 번뇌의 뿌리입니다.
 
자아가 옳거나 그르다고 판단하는 시비로 인해 두 가지 번뇌가 생겨납니다.
 
첫째, 자아의 사고와 판단 자체가 바로 번뇌가 됩니다. 관념과 망상이라고 하는 업을 짓는 데서 오는 번뇌입니다.
 
둘째, 저 혼자 사고하고 판단하고 마는 것이라면 저 하나의 번뇌에 그치고 말겠는데, 사고와 판단이 말이 되고 행동이 되는 데서 구업과 행업을 짓는 데서 오는 번뇌입니다.

이러니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번뇌가 아닐 수 없다는 겁니다.

2. 영혼과 더 큰 번뇌

제가 구분해서 쓰고 있는 자신, 자기, 자아도 편의상의 방편적 구분일 뿐입니다. 그 셋은 셋이면서 하나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우리 내면에 그와 별도로 존재하는 '영혼(혼령)'이 있다고 합니다. 영혼을 어떤 실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 영혼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그렇다더라, 어디에 그렇다고 하는 말이 있다더라, 라고 하는 식입니다.

그나마 논리적으로 가장 그럴 듯하게 설해 놓은 것이, 불교에서 윤회를 이야기하면서 윤회의 주체로 설정한 아뢰야식(alaya, 저장하다, 저장되다)의 종자(種子, bija)론입니다. '여래장 사상'이나 '불성'이나 '참나'와 같은 생각들이 다 아뢰야식의 변형태들입니다.

시타르타는 무아(無我), 즉 연기(緣起)가 공(空)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모든 것은 자성(自性)이 없다, 실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근기가 낮은 사람들을 위한 방편적 설법으로 '윤회'를 인정한다고 하지만, 그래서 윤회의 주체를 상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 그것이 깨달음의 본질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결국 윤회하는 영혼을 설정해 놓음으로써 더욱  큰 번뇌가 생겨나 버리게 되었습니다.

3. 옆길로 빠지지만 않는다면

아뢰야식이라는 개념을 윤회론으로 가져가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요긴하게 써먹을 수도 있습니다. 윤회론을 폐기해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자신의 물리적 느낌과 자기의 심리적 느낌, 그리고 자아의 논리적 느낌 등이 총괄적으로 저장되는(저장하는) 심층의 느낌체계가 생성될 겁니다. 그것을 저는 내면화라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그저 '내면'이라고 불렀던 겁니다. 그것을 좀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신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자신, 자기, 자아)이면서 하나(신명)인 생명의 생명활동을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즉, 영혼(신명)은 따로 있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유전되고(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활동을 통해 생성되는(緣起하는) 몸의 느낌체계일 뿐입니다. 기일원론에서는 이것을 신기(神氣)라고 합니다.

4. 거룩한 영혼은 또 뭐지?

그런데 거룩한 영혼, 영성, 불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동아시아의 천(天)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은 또 뭐냐는 겁니다.

생명 자체는 자성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한한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의 창조적 발현, 그것이 생명활동입니다.

인간들의 생명활동이 창조적으로 발현해 낸 것들이 집약된 양식을 '문명'이라고 하겠습니다. 문명이 배태해 낸, 결국 인류가 창조해 낸 가장 거룩한 작품이 영성, 불성, 천(天), 신(神)입니다.

성이라는 말로 통합해서 제 생각 속으로 가져오겠습니다.

 '영성은 거룩하게 내면화된 심층의 느낌체계를 일컫는 말'이라고 정의해서 쓰겠습니다.
 
영성이 더욱더욱 깊이 내면화되어서 그 거룩한 영성으로 살게 되면 너와 내가, 성과 속이, 안과 밖이, 귀와 천이, 상과 하가, 남과 여가 따로 없는 동체대비, 대자대비의 거룩한 번뇌로 살 수 있게 되겠네요.

5. '너무' 하지는 말자고요.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조지훈 시인의 <승무>에 나오는 시구입니다.
 
세상살이에 시달리는 것이 번뇌겠지요. 그런데 세속의 번뇌가 '먼 하늘 한 개 별빛'이 되었네요.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세속의 번뇌가 승화된 것이라고 하면, 수학능력시험 답안으로 충분합니다. 윤회하는 번뇌로부터 해탈한 것이고, 믿음으로써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하면, 종교적 답변으로 훌륭합니다.
 
별빛이 저 높은 곳의 그 무엇이 아니라 명멸(明滅)하는 뭇생명(중생)의 삶이라 보면,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고 하는 또 다른 이치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미망의 눈으로 보면 번뇌와 보리(지혜 또는 깨달음)가 둘이지만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 말은 소위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 됩니다. 깨닫지 못한 자들을 밥통으로 만들고, 깨달음을 대단한 것으로 만드는 재미있는 논법이 됩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자거나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 자거나 살아가는 것이 모두 번뇌이고, 그 번뇌를 안고 살아가는 삶이 곧 깨달으며 살아가는 길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 번뇌에 대해, 삶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말이 됩니다. 해탈과 구원과 깨달음은 번뇌를 모두 벗어던지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더 깊고, 더 섬세하고, 더 아름다운 번뇌로 만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6. 느닷없는 결말?

지난 토요일에 어머니를 뵙고 왔습니다. 다음날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모기에 물리셨다는 겁니다. 별일로 다 전화를 하셨습니다.
 
"모기에 물린 곳이 가렵더구나. 너는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났던데 얼마나 가렵겠냐..."  
 
번뇌 가득, 한 세상 깊고 섬세하게 곱게 살아오신 어머니가 거룩한 성인이십니다.
 
"어머니, 사랑해요. 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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