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팔복(八福)과 무욕의 살림살이
<이제 다시 詩作입니다>
팔복
윤동주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八福 팔복
尹東柱 作
朴秀慶 譯
心靈貧困有福兮 심령빈곤유복혜
心靈哀痛有福兮 심령애통유복혜
心靈貧困有福兮 심령빈곤유복혜
心靈哀痛有福兮 심령애통유복혜
心靈貧困有福兮 심령빈곤유복혜
心靈哀痛有福兮 심령애통유복혜
心靈貧困有福兮 심령빈곤유복혜
心靈哀痛有福兮 심령애통유복혜
吾等永遠哀痛兮 오등영원애통혜
팔복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1. 마태오가 전하는 복된 소리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 마태오에게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마태오의 '거듭남'입니다. 마태오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로마에 협력하고 동족들을 착취하는, 멸시의 대상이었던 세리였습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 ‘팔복’이라고 하는 것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복음 5장, 공동번역)
‘마음이 가난한 자’와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한 마태오 복음서의 구절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특히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은 참으로 벼락같이 내리치는 말입니다.
2. 복된 소리의 의미
물질적인 가난과 부유함은 세상살이로서의 살림살이입니다. 이에 대해 마음의 가난함과 부유함은 내면살이로서의 살림살이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을까요? 세속의 욕망이 모두 마음을 살찌우는 것들입니다. 윤동주가 <간>에서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라고 할 때, ‘살찐 나’가 세속의 욕망으로 가득한 그놈의 마음이고 ‘여윈 독수리’가 자신을 성찰하는 그님의 마음입니다.
윤동주는 <팔복>에서 ‘슬퍼하는 나’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 슬픔일까요?
이 슬픔의 원인이 타인과 세상 밖에서 오는 것으로 본다면, 이와 같은 슬픔은 '측은지심' 또는 <서시>에서 노래한 대로 '모든 죽어가는 것'에서 느끼는 '중생한(衆生恨)'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 측은지심을 가진, 중생한을 가진,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게 되는 걸까요?
윤동주를 사랑하는 제 아내와 얘기를 나누어보았습니다. 제 아내는 <천자문>의 '禍因惡積(화인악적) 福緣善慶(복연선경)'을 들어, 측은지심을 가진 자는 선업을 쌓기 마련이고, 선업의 경사가 복으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제 아내의 혜안에 탄복하면서도, 저는 윤동주의 '슬픔'을 자기 내면에서 오는 것으로 볼 때 더욱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윤동주는 원문의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를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팔복 전체에서 말하는 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자괴감에서 오는 슬픔, 자기 삶의 성찰에서 오는 슬픔이기 때문에 위로를 사양하고 영원히 독수리로 하여금 쪼아 먹게 하겠다는 겁니다. 이러니 윤동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유하고 악착같이 굴지 않으면 받게 되는 땅, 그것이 내면의 세계입니다. 천국과 마찬가지로 그 땅 또한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태입니다. 복된 마음의 밭입니다. 긍휼히 여겨 베풀고, 마음을 청결히 하여 나쁜 짓 하지 말고, 화평하게 나누어 먹고, 정의 구현하다 핍박도 받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행하면 자기자신에게 좋다는 겁니다. 암만 설명해주어도 알 수 없지요. 해봐야 좋은지 알 테니까요.
3. 내면세계의 원리
내면의 살림살이가 가난한 사람은 세상의 살림살이에서도 가난한 것이 경제의 원리이겠지만, 내면의 살림살이가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 것은 무욕(無慾)의 원리입니다.
무욕이란 욕망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욕망은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미물이라고 하는 것들에게도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에 그 욕망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삶을 누리는 것을 넘어선 탐욕이 문제입니다. 어디까지가 자연적인 욕망이고, 어디서부터 그 선을 넘어선 탐욕인지 절대적인 구분은 없습니다. 생명은 스스로 동적 평형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호미오스타시스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 늘 깨어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탐욕에 취해 있는 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깨어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아무것도 아닌, 덧 없는 것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할 줄 아는 사람, 무욕의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정태춘이 <떠나가는 배>에서 노래한, '남기고 가져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 그것이 '가난한 마음'이겠습니다.
생명이니 살아가야겠지요.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물질적 탐욕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정신적 탐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더'라는 말은 '더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남는 것'이 있다는 거겠지요. 그래서 남기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남는 것이 무어냐는 거지요? '덧'없다는 겁니다. 그런 줄 알면 부질없이 고통스러워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겠네요.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평화가 있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