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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와 Jun 17. 2024

<반야심경>, 덧없고 부질없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이제 다시 詩作입니다>

1. 시를 화두로 삼고

諸非何啥 제비하사
     - 借般若心經二句 차반야심경이구

秀魌愛憎嚌是非 수기애증개시비
照見五蘊一切空 조견오온일체공
無所得故勿執着 무소득고물집착
流水美哉享今玆 류수미재향금자

다 뭣도 아니다.
     - 반야심경 두 구절을 빌어다 씀

잘 났거니, 못 났거니, 좋아하네, 싫어하네, 옳으네, 그르네,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들이
알고 보면 다 덧없는 것들이다.
다 부질없으니 매여서 휘둘리지 말고
흐르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니, 지금여기를 누리길.

魌 추할 기, 嚌 이러니저러니 할 개, 啥 무엇 사, 玆 여기 자

It's nothing at all.
      - Borrowed two verses from the Heart Sutra

Are you good, bad, like it, don't like it, right, wrong, this and that.
As you know, everything is fleeting.
It's all useless, so don't be tied down and swayed.
They say flowing is beautiful, so enjoy the here and now.

2. 두 구절 차출

照見五蘊皆空 조견오온개공
오온이 모두 공함을 밝게 깨달아

以無所得故 이무소득고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반야심경의 모든 구절을 구구절절이 다시 새기고 돌아보아야하겠지만 제 깜냥에 주제도 안 되고 그럴 계제도 아니니, 제가 간직하고 있는 위의 두 구절을 술안주로 삼아봅니다.

3. '연기론'은 론이고, <잡아함경>은 경이지

照見五蘊皆空 조견오온개공

  오온은, 육체적 색(色), 정신적 수상행식(受想行識) 등 미혹한 세계의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입니다. 오온의 인과관계를 연기(緣起)라 합니다.

  대표적인 연기론인 12연기를 보겠습니다.

  무명(無明)으로 인해, 행(行, 전생 전체의 業)이 생기고,
  행으로 인해, 식(識, 현생에서 물려받은 전생 전체의 업)이 생기고,
  식으로 인해, 명색(名色, 태아의 신체와 정신)이 생기고,
  명색으로 인해, 6입처(六入處, 태아에게 안이비설신의 육근)가 생기고,
  6입처로 인해, 촉(觸, 모태 밖에서 세상과 부딪히는 접촉)이 생기고,
  촉으로 인해, 수(受, 이러저러한 느낌)가 생기고,
  수로 인해, 애(愛, 좋거나 싫은 욕망)가 생기고,
  애로 인해, 취(取, 집착)가 생기고,
  취로 인해, 유(有, 내생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가 생기고,
  유로 인해, 생(生, 다음 생)이 생기고,
  생으로 인해, 노사(老死)가 생긴다.

  그래서 현생의 오온이 다하고 내생의 오온이 생기는 것을 윤회라고 한답니다. 불교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로 계시는 분의 설명입니다.

  싯다르타가 이렇게 설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인 <잡아함경>에는, 이렇게 설해져 있답니다.

   <색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색에 즐겨 집착하고, 색에 즐겨 집착하기 때문에, 다시 미래의 모든 색을 만들어 낸다. 이와 같이 범부는 수상행식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수상행식이 또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되면서 설해짐) 미래의 색수상행식이 생겨나기 때문에 색에서 해탈하지 못하고 수상행식에서 해탈하지 못한다.>

  얼마나 간명하고 아름다운가요? 태아니, 죽음이니, 윤회니 하는 잡설 없이 오온이 과거에서 미래로 연기한다는 것을 설하고 있지 않은가요?
  
  그 연기를 조견, 밝게 비추어보니, 반야(지혜)로써 깨우쳐보니, 개공, 모두 ‘공’하더라는 것 아닌가요? 그것을 한 마디로 연기즉공(緣起卽空)이라 합니다.

  론이 경에 당할 수 있으려나요?
 
4. '나'가 없다는 것과 덧없다는 것

  공이 뭐냐는 겁니다. 용수(나가르주나, 대략 2세기 무렵의 인도사람) 이후 무자성(無自性)으로 공성(空性)을 논하는 것이 비롯되었습니다.

  공에 대한 제 풀이는 이렇습니다. 저는 용수의 무자성 개념을 받아들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어떻다는 건가요? 제행무상(諸行無常), 덧없다는 겁니다.
  공이란 한 마디로 '덧없다'는 겁니다. 고다마의 깨달음이 어디 필부의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겠느냐고요? 무어 중뿔난 거 있겠어요? 그 중뿔난 것을 자꾸 지어내느라, 윤회니 돈오돈수니, 극락과 지옥이니 하는 것 아니겠는지요?

5. 다 부질없으니

以無所得故 이무소득고

  그럼으로써, 아무리 해봐야, 소득, 얻은 것, 얻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이무소득고에 대한 제 풀이는 이렇습니다. 얻은 것, 얻을 것이 없는데 아등바등 이루려하고, 얻었다고 하고, 얻겠다고 하고, 이래저래 일희일비하는 것들이 다 한 마디로 '부질없다'는 겁니다.

  부질없다는 말은 '붙질'에서 왔다고 봅니다. 거기서 안 왔어도 그렇게 정의해서 쓰렵니다. '붙질'이란, 붙잡으려고 그것을 좇는 짓을 말합니다. '집착'입니다. 싯다르타가 그랬잖아요.

  <색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색에 즐겨 집착하고, 색에 즐겨 집착하기 때문에, 다시 미래의 모든 색을 만들어 낸다.>

  붙잡으려고 좇을 것 없다는 겁니다.

6. 결국

  제가 간직한 두 구절에 대해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모두 다 '덧없고 부질없다'는 겁니다. '덧없고 부질없다'는 것을 또 다른 한 마디로 저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합니다. 대단해 보이는 그 무엇도 알고 보면 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공’을 무어라 하면 그것은 그것일 뿐이지 공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은 언어를 떠나있다고 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무어라 해도 그것은 그것일 뿐이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도 언어를 떠나있다는 점에서는 공과 같습니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그 공을 깨달아야할 어떤 것이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대단한 그 무엇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그 깨달음에 의해서 깨달은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7. 그래서 어쩌라고

  ‘아무것도 아닌 것’은 말 그대로,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깨닫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선택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선택하고 싶으면 깨닫고자 애쓰면 됩니다. 그냥 살아온 대로,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삶을 선택하든 자기 선택입니다. 물론 혼자만의 선택이 아닌, 관계 속, 인연 속, 어떤 상황 속에서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 선택들이 다 현실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애쓰는 것이고, 힘들여 이루려 하는 것이겠습니다.

  이런 매 순간의 자기 선택을, 저는 ‘다 저 하기 나름이다’라고 합니다.

8. 그리하여 저는

  <아름다움>을 선택했습니다.

  <반야심경> 구절이야 제 생각과 달리 매우 심오한 구절이겠지만, 그리 알고(알음다움, 반야, 지혜), 모를 만한 것은 남겨둔 채로, 저를 포함한 모든 중생을 어여삐 여기면서(안음다움, 앓음다움, 자비, 사랑), 이래저래 떠들어대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기도 하겠지만, 아무 것도 아닌 가운데 슬며시 덧없고 부질없는 이러저러한 인연(알움다움-因, 안음다움-緣) 속에서 한 세상 알흠답게 살다가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겁니다.

  그 이상은 모름지기 입 꾹 다물고, 아는 것(알음다움)이나 열심히 실천하는 것(알흠다움)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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