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언처럼 쓰이는 칠언댓구입니다. 자기와 남, 묵상과 담론, 하라와 하지 말라, 공과 과, 시와 비 등이 대비되는 댓구입니다.
하곡 선생님은 후구(後句)를, '꿈 속에서라도 남의 잘못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의 '夢中莫論人事非(몽중막론인사비)로 쓰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말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행이 어려운 말씀입니다. 무슨 말을 덧보탤 것 없을 것 같은 귀한 글귀에 몇 가지 제 생각을 적어 봅니다.
1. 유시민 작가의 지인이 유작가에게 일러주었다는 말
첫째, 자기가 무슨 말을 할 때, 그 말이 옳은 말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둘째, 그 말이 옳은 말이라 해도, 그 말을 꼭 해야 하는가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셋째, 그 말이 꼭 해야할 옳은 말이라 해도, 그 말을 친절하게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첫 번째는 사실과 시비의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당위와 필요의 문제입니다. 세 번째는 방식과 태도의 문제입니다.
유작가의 지인의 현철함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첫째, 정오(正誤)와 시비(是非)는 가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얘기의 핵심은 자기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전제가 항상 깔려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옳고 남이 그르다, 또는 그 반대로 남이 옳고 내가 그르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닫힌 생각입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다른 생각의 가능성을 열어둔 대화가 소통의 기본 자세라는 겁니다.
둘째, 왜 그 말을 하는가 하는 측면에서, 메시지의 전달과 사실의 확인까지가 그 이유인가 아니면, 상대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있는가 하는 데까지 고려해 봐야 합니다.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이루기 힘든 목표입니다. 앞의 항목에서 이야기한 소통의 기본 자세가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셋째,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그 사람의 기질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성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겸손하고 성찰하는 자세와 교만하고 우매한 자세가 있을 따름입니다.
2. 그님이 그놈에게 일러주었다는 말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 '나와 남'의 관계에서의 이야기였다면,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나의 내면'의 문제입니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握手)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내면에 수없이 많은 '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생각하는 나와 행동하는 나, 이성적인 나와 감성적인 나 등등 수없이 많은 '나'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많은 '나'에, 저는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나'와 '그 나를 지켜보는(성찰하는) 나'라는 한 쌍의 나를 제안해 봅니다. 그것을 각각 '그님'과 '그놈'이라고 이름지어 주고자 합니다.
윤동주의 시에 앞의 '나'는 '그님'이고 뒤의 '나'는 '그놈'입니다. '생각하는 나'와 '행동하는 나'라는 한 쌍의 나와는 다른 나입니다.생각도 '그놈'이 하는 것일 수 있다는 거지요. '생각하는 나'마저도 깨어서 지켜보는 나가 '그님'이랄 수 있는 겁니다. 남방불교에서 행하는 '위빠사나'수행을 일상의 삶 전체로 확장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님'(성찰하는 나)이라고 설정해 보기도 합니다. 제가 제 안에 모신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사신 분들, 예컨대 어머니, 아버지, 장인어른, 장모님께서 그님이 되셔서, 제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계신다고 여기는 겁니다. 효과는 좋습니다. 문제는 그님이 잠드시거나 쉬시거나 출타하신 때가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 남명 조식 선생은 '성성자'(惺惺子)라는 두 개의 쇠방울을 차고 다니며,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지니려는 경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조선의 선비들이 한결같이 강조한 '경'(敬)이라는 것이, 모든 것에 깨어있는 자세로 임하는 것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