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곡께서 택하신 판본에서는, '어찌(爭) 하면 두류산(頭流山)처럼(似) ~하리오?'라고 설의법으로 쓰여, 두류산(지리산)이 강조되었습니다. '만고천왕봉'본에서는, 천왕봉이 강조되어 있는데, 천왕봉이 지리산의 주봉이고 보면, 결국 뜻은 서로 통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2. 남명의 시를 통해 드는 생각
'천석종'이라는 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천석종은 엄청 무겁고 큰 종이겠습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당목(撞木)으로 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소리를 안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떨 때, 왜, 어떻게, 어떤 소리를 내느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두류산(지리산)과 천왕봉은 어떤 의미일까요? 천석종이 무거움을 말했다면, 두류산은 깊음이고, 천왕봉은 높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깊은 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주인 같은 느낌이 듭니다.
결국 천석종이 내는 소리, 두류산, 천왕봉의 울음소리는 묵직하고 깊고 높은 소리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를 통해서는 그 소리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유추하기 어렵습니다. 지리산과 천왕봉을 통해 곧 바로 지리산과 청왕봉의 기개(氣槪)를 이야기하는데, 이 시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거기서부터 조금 더 나아가 사상적인 의미를 탐색해 보려고 합니다.
3. 남명이 주자학자인가?
남명을 흔히 동시대 퇴계 이황과 견주어, 그 두 사람을 '도학(道學)의 쌍벽'이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도학'에서는 '도'(道)를 우주의 근본적인 본질로 봅니다. 그 도를 달리 '리'(理)라고도 하기에 이학(理學)이라고도 합니다. 도학(이학)에 대응되는 개념이 '기학'(氣學)인 겁니다. 이학과 기학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 주자학입니다.
주희가 공자 맹자 등에서 유래한 원시 유학에 대해 이기론과 성정론으로 재해석하고 집대성한 것이 '주자학'입니다. 그래서 주자학을 성정론의 성과 이기론의 리를 따와서 성리학이라고 부르고, 원시 유학에 대해 신유학이라고 부르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흔히 '도학의 쌍벽'이라고 일컬어지는 남명과 퇴계는 주자학자(성리학자, 신유학자) 가운데 이학자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반은 맞고 반은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4. 조선의 선비들은 정통 주자학자들이 아니었다.
저는 20대 때 한민족의 전통사상에 침잠했었습니다. 그 때 제 생각의 총론적 결론은 이랬습니다.
한민족은 기마민족 사상인 3수 사상을 바탕으로 농경사상인 2수 사상을 결합하여, 우리 민족 특유의 '천지인 사상'을 배태시켰다는 겁니다. 중국은 태극과 무극을 말할 뿐입니다. 한민족은 태극과 무극과 황극이라는 삼태극을 말합니다. 그 삼태극 사상이 한민족의 단학(丹學)입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주자의 도학을 경전으로 공부하면서, 민족 고유의 단학을 수련했던 겁니다. 명상을 통한 정신 수련과 호흡-도인(導引) 등을 통한 신체단련으로 내단(內丹)을 완성하고 그 기백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을 재세이화 홍익인간(在世理化 弘益人間)의 사상이라 합니다.
5. 그렇다면 남명은?
남명이라는 호는, <장자>에 나오는 붕새의 최종목적지인 '남명'에서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외면적으로는 중국 도가사상에 연결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족 고유의 단학에 그 뿌리가 있다고 봅니다.
남명뿐 아니라 조선의 선비들은 한결같이 '경'(敬)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남명은 '경도'(敬圖)를 그려 여러 선비들이 '경'에 대해 논한 글을 한 눈에 알기 쉽게 그려놓기도 했습니다. '경'이란 항상 깨어있음으로써(恒惺惺法 항성성법), 몸가짐을 바르고 엄숙하게 하고(整齊嚴肅 정제엄숙), 흩어져 있는 마음을 거두어들여(其心收斂 기심수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主一無適)이라고 했습니다.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단학의 전통을 '경'으로 집약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명 조식의 <경도>
여기에 남명은 '의'(義)를 실천의 덕목으로 삼음으로써 '경의'(敬義) 사상을
이룩하고 후학을 양성했습니다.
남명이 시에서 이야기한 지리산 천왕봉의 의미는 사상적 내용으로는 '경의'이고, 사상적 연원으로는 단학을 바탕으로 한 도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선비들을 통해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민족 고유의 단학의 전통이 끊어질 듯하면서도 면면히 이어져왔습니다.
6. 그렇다면 우리는?
저는 도학(리학)이든 기학(氣學)이든 단학(丹學)이든 어느 하나를 취하고 다른 것들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유파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삶과 우주의 이치에 대해 묻고 배운 바를 자기 삶에 적용하는 과정, 즉 학문(學問)하는 자세가 있을 따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