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와 Nov 09. 2024

박제가, 시를 쓰되 고루하게 쓰지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하곡 서 청와 론, 서론(書論)

초정 박제가 시, 하곡 김동운 해서


家居絶句 가거절구


楚亭 朴齊家 초정 박제가


天光正綠濶 천광정록활 평평측측측

今日好逍遙 금일호소요 평측측평측

白雲望可飽 백운망가포 측측측측측

行吟以爲謠 행음이위요 측측측측측


집에 틀어박혀 절구를 짓다


하늘이 빛나며 때마침 푸르고 넓으니

오늘은 슬슬 거닐며 다니기 좋겠구나

흰 구름을 만족스레 바라보며

거닐면서 읊으니 노래가 되었네.

(<가거절구> 첫 번째 수)


[청와 론]


1. '거(居)' 짜를 어찌 하오리까?


시의 전체 내용을 보면, 한가로이 거닐며 시를 읊조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수와 세 번째 수를 함께 읽어보면,

소요하며 읊는 시가 마냥 한가로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游絲綠樹外 유사록수외

烟氣復闤闠 연기복환궤

且以思君故 차이사군고

極目到無際 극목도무제


아지랑이는 푸르른 나무를 벗어나고

연기는 저자 거리로 돌아가네.

또한 님을 사모하는 까닭에

눈길이 닿을 수 있는 가없는 곳에 이른다네.

(<가거절구> 두 번째 수)


細君春多病 세군춘다병

歸家厭酬對 귀가염수대

尋醫薄暮過 심의박모과

纖月在人背 섬월재인배


아내는 봄이 오면 질병이 많아지는지라

집에 돌아가 봐야 술잔 마주하기 싫어하네.

의원을 찾아가니 땅거미는 지나가고

초승달이 사람들 등 뒤에 떠있구나.

(<가거절구> 세 번째 수)


두 번째 수의 '푸르른 나무(綠樹)'와 '저자거리(闤闠)'와 '가없는 곳(無際)'의 대비는 각각 '고루한 관습'과 '살아 숨쉬는 일상'과 '사회개혁을 향한 열망'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歸家), 집에는 다병한 아내(細君)가 있을 뿐입니다. 둘째 수의 '사군(思君)'과 셋째 수의 '세군(細君)'의 대비가 절묘합니다.


결국 <가거절구>라는 제목에서 '가거(家居)'는 아내에 대한 불만을 떠나서, 자신의 신세와 야망 사이의 갈등과 고뇌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안일(安逸)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집에 틀어박혀' 지내고 있는 심정을 '거(居)' 짜 한 자에 절묘하게 나타냈다고 보는 겁니다.


2. 이서구가 노래한 한(閑)과 박제가가 읊은 한(恨)


조선 후기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와 함께 박제가는 후사가(後四家)로 칭송되었습니다. 청나라에서도 인정할 만큼 시를 잘 썼다는 겁니다. 이들은 모두 박지원의 후학으로서, 정조에 의해 발탁되었지만, 갈 길이 달랐습니다.


그 차이는 서얼과 양반의 차이였습니다. 이서구는 양반이었기에, 그의 시풍에는 한적함과 선경(仙景)이 드러납니다. 이에 비해 박제가는 서얼이었기에, 그의 시풍에도 한적함이 나타나지만 그 속에 '한(恨)'이 배어있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3. 시를 쓰되 고루하게 쓰지 말고


박제가는 후사가로 청나라 문인학자들에게 칭송을 받을 정도로 시의 품격에 있어 대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위의 시는 어떤가요?


5언절구의 시로서, 2구 4구의 마지막을 '측성'인 '요'로 압운을 했습니다.


그러면 5언절구의 시를 지을 때 측기식(仄起式)의 평측은 다음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평평측측평

측측평평측

평측측평평

측평평측측


박제가가 지은 <가거절구>의 옆에 제가 적어놓은 평측과 다름을 알 수 있지요? 한시의 대가인 박제가가 평측법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4. 똑 이렇게 쓰럇다


조선후기는 그야말로 천변만화하는 기운이 밑바닥에서부터 생동하고 깨어있는 자들에 의해 추동되었던, 사회문화의 격변기였습니다.


민중의 각성과 문학예술활동이 전자이고,

'실학'이라 일컬어지는 사회 개혁의 흐름과 '동학'의 창건, '기학(氣學)'의 학문적 진작이 후자입니다.


그와 같은 경향이 한시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내용 면에서 한시가 민요를 수용하고, 세태 풍속을 노래합니다. 형식 면에서 당나라 이후의 근체시 작법을 버린, '조선풍의 한시'가 대두하게 됩니다.


박지원은 이덕무가 쓴 시를 두고, 옛 중국을 모방하지 않고 지금 이곳 조선을 노래했다면서 '조선의 노래(朝鮮風)'라 불러도 상관없다고 치켜세웁니다. 정약용은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에서 “나는 조선 사람이니 조선시를 즐겨 지으리라(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라고 선언합니다.


저는 한시(漢詩)를 짓는 재주와 능력도 없기에, 제가 짓는 시를 한시(韓詩)라고 하는 겁니다.


박제가의 시는 '조선시', '한시(韓詩)'라는 겁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