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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와 Nov 24. 2024

한강 시 <심장이라는 사물>, 제목과 시의 숨바꼭질

한강 시 <심장이라는 사물> 읽기, 제목과 시의 바꼭질

심장이라는 사물

​    - 한강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14-15쪽)

[청와 론]

1. 극단적 음운간(音韻間)

저는 제가 꽤나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극단적인 생각이란, 생각할 수 있는 가능한 극단까지 생각을 해본다는 겁니다. 그 극단적인 생각을 견뎌낼 때 비로소 그 <생각>이 <생각>으로서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한강의 시를 보면서, "아~ 이 사람 참 생각이 극단을 넘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이야기할 때, <행간(行間)>이라는 말을 합니다. <행간>은 시의 한 행과 다음 행 사이에, 나타나 있지 않은 숨은 <말(의미)>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강은 그럽니다.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문장 속에 밝히지 않고 숨긴 <말>이 있다면, 그 <말>은 어구와 어구 사이에 있는 말 <어간(語間)>이 됩니다.

한강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음소간(音素間)>과 <음운간(音韻間)>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음소 안에서도 <곧게 이어진 데>와 <구부러진 데>, 그런 음소 내부의 글씨 쓰기의 과정까지 이야기하는 겁니다.

참으로 사고가 극단적이랄 수밖에요.

2. 아직도 배가 고프답니다.

행간을 통해 그렇게 자기의 생각을 지워놓고, 비워놓고도 성에 차지 않는답니다. <음운간>이 있다면 그것 마저 표현하고 싶답니다.

그 좁은 곳에 들어가려면, 말하려는 <나>가 그만큼 작아져야 합니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그렇게 함으로써 어디까지 이르고자 하는 걸까요? <희미해지려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지워지고, 비워지고 싶은 겁니다. 그것이 <욕망>이 되었거나 <자존심>이 되었거나, 그 무엇 하나 바람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3. 지금의 모습은

두 가지가 갈등하면서 공존하고 있습니다.

1) 덜 지워진 칼로 길게 입술을 가르는 나
2)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치는 나

1)의 <덜 지워진 칼>은 <나의 혀>입니다.  그 혀가 길게 내 입술을 가른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2)의 <나의 혀>는 더 이상 입술을 갈라 말하지 않고 안으로 뒷걸음질칩니다.

4. 제목이 왜 그래?

<심장이라는 사물>이라는 제목은 시의 내용과 달리 생뚱맞습니다.

제목은 한 마디로 <사물>입니다. 시의 내용은 한 마디로 <언어(말)>입니다.

제목과 시의 내용의 관계는 <말과 사물>, <언어와 사물>의 관계입니다.

언어는 사물을 낚는 그물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물>이 <심장>과 동격으로 되어있습니다. 심장이 뭐겠어요? 팔딱팔딱 살아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팔딱팔딱 살아숨쉬는 <사물>을 낚고, 지시하는 <언어>라면, 그 <언어> 또한 살아있는 <언어>라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거지요.

<언어>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언어가 숨쉴 수 있는 <틈>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침묵이 가장 넓은 틈이겠는데, 사물만 남고 언어는 사라지게 되는 거지요.

틈을 조율하는 것, 그것이 언어의 그물을 성글게 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래서 지우고 비우자네요.

보세요. 시가 끝났다는데, 형태는 어떤가요?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말을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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