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 많은 이 세상, 죽임의 미학
밥통성찰록
신명이 억눌려 응어리진 것이 한이다.
1. 여한(餘恨)
이루지 못한 소원이 응어리진 감정이 여한(餘恨)이다. 여한은 각자 빌어먹고 살아가는 각생의 삶에서 생긴다. 비는 것, 이루려고 하는 것, 바라는 것이 무엇이 되었거나 과정과 결과가 문제다.
과정은 이루어감이고, 결과는 이루어짐이다. 이루어가는 과정은 자기 몫에 최선을 다하는 인사(人事)이고, 이루어지는 결과는 인연 따라 되어가는 천명(天命)이다. 그래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한다.
인사를 잘 못해서 남는 여한을 후회라 하고, 천명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생기는 여한을 미련이라 한다. 후회나 미련이나 덧없는 집착에서 온다.
이루어가는 과정에 집중하면서, 이루어진 결과에 집착하고 있는 그놈에게 ‘씽긋’ 하고 미소 지어준다.
2. 원한(怨恨)
해코지를 당해 응어리진 감정이 원한(怨恨)이다. 원한은 상극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상극의 내면에는 이원론이 있다. 너와 내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거다. 둘이 각생의 방향으로 발현되면 조화로운 다양성이 구현되지만, 상극의 방향으로 발현되면 극단적인 갈등인 불구대천지, 철천지원수지간이 되는 거다.
3. 원한(寃恨)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해 응어리진 감정이 원한(寃恨)이다. 원한은 생극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생극은 둘이면서 하나인 공동운명체가 바탕에 깔려있다. 상극은 ‘둘’이고, 생극은 둘이면서 하나인 ‘두레’이다. 가족과 같은 관계에서 억울한 심정이 든다고 해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는 할지언정 앙갚음을 하려 들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는 깨지고, 생극은 상극의 관계로 바뀌게 된다.
4. 중생한(衆生恨)
죽어가는 모든 것들의 고통을 가여워하는 감정이 응어리진 것이 중생한(衆生恨)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윤동주, 서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마음이 성인의 섬세한 감수성이다. 땅 위의 죽어가는 모든 유한한 존재에 대해 하늘의 별은 영원을 상징한다. 유한한 존재에게 영원이란 끝이 없는 시간이 아니라, 생명의 한 맺힌 한평생을 말한다. 오늘 밤에도 바람에 스치우는 별이 곧 잎새이고, 잎새가 곧 별이다. 별도 스러져가는 중생일 따름이다.
5. 삭히고 삭아서
여한(餘恨)과 원한(怨恨), 원한(寃恨)이거나 중생한(衆生恨)이거나, 살아가면서 한이 없을 수는 없다. 누구나 한은 부정적이라 여겨 쌓이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쌓이기 전에 바로바로 풀어버리려 한다. 풀어지지 않은 한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 들어간다.
한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이 삭힘이다. 그놈의 한을 그님이 따스한 거리에서 품어주면, 한은 삭고 삭아서 삶의 깊은 그늘이 된다. 그늘에 대해서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 밝은 그늘의 미학>에서 이야기해 보겠다.
6. 윤동주는 아름다운 시, <서시>를 남겼고, 윤동주를 사랑하는 아내는 <서시>를 영역했다. 아내와 윤동주를 사랑하는 나는 외람되게 <서시>를 한역해 보았다.
서시, 윤동주
Prologue, translated by Kim Su Jin
序詩 서시, 朴秀慶 譯 박수경 역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Till the day I die,
Looking up to the sky,
仰天至歿日 앙천지몰일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Wishing to have no spot of shame,
祈無一點愧 기무일점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Even at the wind blowing on leaflets,
因風掠葉子 인풍략엽자
나는 괴로워했다.
I was agonizing myself.
吾裏惱而苦 오리뇌이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With the heart singing for starlets,
以心歌頌辰 이심가송진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For all the mortal beings I'll have affection.
當愛死之悉 당애사지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And I will tread on the road given to me.
宜歩付我路 의보부아로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Also tonight, stars are tenderly touched by the wind.
今宵風撫星 금소풍무성
(그리운 어머니 만나뵈러 가는 전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