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전쟁 속에서 나를 지키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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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또삐


프롤로그 — 같은 결핍을 품은 두 사람, 서로 다른 높이를 바라보다


서울 도심의 끝자락에 위치한 오래된 사립대.
밖에서 보면 반듯하고 고급스럽지만,
그 내부는 오래전부터 경쟁과 불안이 굳어버린 땅이었다.
누구도 완전히 안전할 수 없는 곳.
자리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취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다.

그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박양이는 젊음과 건강을 조금씩 깎아내며
결핍을 버티고, 야망을 지키기 위해 오래 견뎠다.

사람들은 가볍게 말했다.
“프랑스어도 잘하고, 콘텐츠도 만드는 거 보니 잘난 교수 같네.”

하지만 그 말은
그녀가 치르고 지나온 수많은 밤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언어였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7년간의 보따리 외래강사 시절,
서울과 지방을 하루에 두 번 넘나들며
새벽 기차 안에서 강의안을 다듬다 하차 할 곳을 놓친 경우가 허다했다
다음 학기 배정이 끊기면
그냥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질까 두려워
잠들지 못한 밤들이 있었다.

과도한 스케줄로 고혈압이 생겼고,
어느 밤에는 갑자기 숨이 막혀
창문을 열고 쪼그려 앉아
한참 동안 공기만 들이키던 공황의 첫 순간도 있었다.


그래서 임용이 확정되던 날
그녀는 조용히 울었다.
기쁨보다 먼저 찾아온 감정은
드디어지워지지 않을 자리 얻었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잘 안다.
이 대학에서 어떤 자리도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정상에는
강무헌 총장이 서 있다.

그는 화려하다.
과감한 비전, 자신감 넘치는 발언,
쇼맨십을 닮은 리더십.

하지만 그의 과거 역시 화려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이 대학이 재정난으로 흔들릴 때
행정 직원으로 시작해
등록 설명회를 위해 전국을 떠돌았다.
비 오는 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김밥 한 줄을 씹으며
“이 학교도, 나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고 중얼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 역시 약자의 자리에 서본 사람이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 절대 흔들리고 싶지 않아 한다.
‘서울 TOP3’라는 말은 야망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과거를 밀어내기 위한 방패이기도 하다.


박양이와 강무헌.
두 사람은 서로를 거의 모른다.
하지만 같은 결핍을 품고 있다.

나는 다시 밀려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 결핍은
조용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늘의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본편 — 교육과정 하나가 사람을 흔드는 날

회의실 문 앞에 선 순간
박양이는 알았다.
오늘은 말 한 줄이 칼이 되고
표정 하나가 누군가의 자존심을 흔드는 날이라는 것을.

총장이 전날 “산업연계 강화!”를 외쳤다는 소문이
벌써 학과를 흔들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빠르고,
표정은 조심스러워졌고,
공기는 이미 긴장으로 묽어졌다.

1. 회의실. 말보다 먼저 때리는 ‘공기’

박양이는 입구들어서자 잠시 걸음을 멈췄다.
회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교수들의 자세가 평소와 달랐다.
등이 조금 더 곧고, 서류는 정갈하게 정렬되어 있고,
누군가는 괜히 펜을 손가락 사이로 굴리고 있었다.

“아, 오늘… 뭐 있구나.”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리로 걸어가는 순간,
장견제 교수와 눈이 스쳤다.

견제는 낮게 말했다.
교수, 오늘 긴장 하시오.”

그 말투엔 조언도, 미소도 없었다.
그저 오래된 사람만이 가진 ‘촉’ 같은 것이 있었다.

박양이는 그 짧은 문장 속에서 미묘한 냄새를 읽었다.
경계 + 약간의 기대 + 그리고 불안.


2. 윤사린의 등장 — 이미 답을 준비한 사람의 얼굴

회의가 시작되려던 찰나,
문이 ‘스윽’ 열렸다.

윤사린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발소리도 없고, 표정 변화도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 침착함 자체가 메시지였다.

오늘 준비되어 있다.”

그녀는 박양이의 자리 앞에 와
정중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오늘 안이 궁금해서 자료를 조금만들어왔어요.”

박양이는 순간 눈썹이 흔들렸다.
“자료요…? 어떤…?”

사린은 태연하게 노트북을 열며 말했다.
산업 연계 중심으로요.
요즘 총장님 기조에 맞춰보면
교수님의 교육과정에 조정이 필요할 수도 있어서요.”

그 말투는 친절했다.
그러나 친절이 너무 완벽하면
그건 칼날이다.


3. 사린의 지적 — 부드러운 칼이 가장 깊게 들어간다

윤사린은 화면을 넘기며 설명했다.

여기 보시면요,
과목은 현재 산업 수요가 3%대입니다.
기업들은 이걸 거의 요구하지 않아요.”

‘요구하지 않아요.’
그 말이 칼끝처럼 테이블 위에서 튀었다.

사린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융합 트랙
기업들이 선호하는 인재상과 조금 다르죠.
학생들이 취업에서 불리할 있어요.”

박양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다르다’는 말은
‘틀렸다’는 뜻이라는 걸
이 대학 사람들은 다 안다.


4. 장견제의 폭발 — 오래된 방식이 흔들릴 때

사린의 말이 끝나자,
견제 교수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쳤다.

교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산업이란 그렇게 숫자만 본다고 되는 아니오.”

사린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응시했다.

교수님,
요즘 산업 변화는 속도가 중요하잖아요?
경력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이 예전 방식을 따라가지는 않으니까요.”

‘경력도 중요하지만’
그 한 문장에 견제의 자존이 흔들렸다.

견제:
내가 분야에서 굴러먹은 세월이 얼만데—”

사린:
그렇죠. 그래서 업데이트가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박양이는 그 순간 느꼈다.
아, 이건 단순한 의견 싸움이 아니다.
세대·방식·욕망이 부딪치는 장면이다.


5. 학과장의 한마디 — 베테랑은 전쟁을 향기로 맡는다

두 사람의 기싸움이 더 날카로워지기 전에
학과장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말씀 일리 있습니다.
그럼 교수님 의견을 들어볼까요?”

그의 말은 부드럽지만
절대 피할 수 없는 공이었다.

박양이는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걸 느꼈다.
이 대학에서,
이 순간은 한 교수의 생존을 결정하는 장면이었다.


6. 박양이의 반격 —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힘이 된다

박양이는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교수님 의견 들었습니다.”

사린의 눈이 살짝 움직였다.
그 단 한 번의 움직임이
‘지금부터 네 말을 분석하겠다’라는 의미였다.

박양이는 흔들리지 않고 이어갔다.

하지만 제가 설계한 교육과정은
지금의 산업 수요가 아니라
3 변화 흐름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사린이 펜을 멈췄다.

박양이는 계속 말했다.

지금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없을
우리가 선도할 있는 분야가 생기는 거죠.”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견제 교수도,
사린도,
심지어 학과장도
그 말을 곱씹고 있었다.

박양이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산업은 빠르게 변합니다.
교육은그보다 조금 앞서야 합니다.”

그 문장을 내뱉는 순간
자기 안에서도 무언가가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오늘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7. 홍달래의 경보 — 이 대학의 평화는 원래 오래 가지 않는다

문이 열리며 홍달래가 뛰어왔다.

교수님들! 총장님이
이번 학과 평가에서산업 연계
1순위로 보겠다고 다시 말씀하셨어요!”

회의실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견제 교수는 미묘하게 불편해했고,
사린의 눈빛엔 새로운 계산이 뛰고 있었으며,
학과장은 상황을 곡선으로 그리는 사람처럼
잔잔히 웃었다.

박양이는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여기서는 어떤 싸움도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구나.


Epilogue — 흔들리는 마음을 지켜주는 건 작은 원칙 하나

사람들은 누구나
두려움 때문에
말이 날카로워지고
표정이 굳어진다.

사린은 뒤처질까 두렵고,
견제는 사라질까 두렵고,
학과장은 무너질까 두렵고,
총장은 실패가 두렵다.

그리고 박양이는—
다시 ‘지워지는 사람’이 될까 두렵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예민함을 삼키고,
상처를 가볍게 털고,
때로는 얌체처럼 슬며시 피해가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게 지금의 박양이가 가진
가장 절실한 꿈이자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자기 방식으로
또 하루를 버텼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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