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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온 Jul 04. 2024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어린시절의 성장통, 영화〈비밀의 언덕〉 

 “고마움을 잊지 않는 최고의 방법은 숨기지 않는 것”        



***


가족은 나에게 고유한 이방인적 기질을 처음으로 확인시켜준 곳이다. 가족 내의 이방인, 마치 돌연변이처럼 나는 가족 내의 다른 구성원들과 달랐다.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오만이었을까. 어쨌든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다른 가족과 유별나게 다른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영화〈비밀의 언덕〉을 보면서 자신이 가족 내의 이방인이라는 것을 어색하게 눈치채가던 열두 살 무렵의 내가 떠올랐다.      


열두 살 소녀가 ‘숨기고 싶은 비밀’이란 통과의례를 넘어가며 성장해가는 모습을 담은 영화〈비밀의 언덕〉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바로〈비밀의 언덕〉의 열두 살짜리 주인공 ‘명은’이라는 캐릭터이다. 누구나 경험해 알고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영화〈비밀의 언덕〉을 잔잔한 개성을 담은 독창적인 영화로 만들어주는 데에 ‘명은’이라는 캐릭터가 있기 때문이다.      


가상의 도시 성원시에 자리한 한 초등학교 5학년 반장인 ‘명은’이의 캐릭터는 한국 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여가는 주체성을 가진 어린이 캐릭터. ‘명은’이는 한 명의 독자적인 인간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해가며 그 과정에서 성장해가는 매우 독립적인 ‘어린이’ 캐릭터이다. 이러한 캐릭터는 우리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부분이기에 소중하다.      


‘비밀’을 가지는 순간 더 이상 우리는 어린 아이가 아니다. 영화 첫 장면에서 가정환경조사를 따로 해달라는 부탁을 위해 선생님에게 줄 선물을 심혈을 기울여 고르는 명은이는 그 나이대의 아이가 가질 수 있는 자존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순간 명은이는 자신만의  ‘비밀’의 입구에 서 있게 된다.   

  

영화는 그 나이 또래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공감하며 따라간다. 그리고 명은이의 마음을 열심히 끝까지 귀 기울이며 듣는다. 명은이의 갈등과 자존심에의 상처는 보는 사람에게 충분히 전달되고 그 과정에서 명은이는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소화시켜 수정하는 과정을 갖게 된다.


영화는 명은이와 반대되는 지점에 ‘혜진’이라는 캐릭터를 던져놓는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친구들에게 선생님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엄마 아빠를 감추기 위해 애쓰는 명은이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캐릭터가 ‘혜진’이다. 학급 발표 시간에 엄마 직업이 아가씨 골목에서 술집을 하는 사장님이라고 솔직하게 밝히는 혜진이는 글을 통해서도 부모의 이혼과 엄마의 직업 때문에 따돌림당하고 매일매일 전쟁과도 같이 살아왔다고, 매일매일 가슴에 총을 맞고 피 흘렸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자신과 정반대의 혜진이란 캐릭터가 등장함으로써 명은이는 자신의 지나친 부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수정할 기회를 가진다. 혜진이를 보며 명은이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담은 글을 쓸 용기를 낸다.      


혜진이에게 자극을 받은 쓴 ‘손녀로부터 온 편지’라는 제목의 글에서 명은이는 그동안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가족이 무엇일까라는 물음과 함께 자신에게 가족은 물음표이고, 놀기만 좋아하고 게으르고 젓갈만 반찬으로 싸주는 아빠가 창피하고, 돈밖에 모르고 옷도 대충 입고 교양 없는 엄마가 창피하다고, 왜 다들 나의 입장은 생각해주지 않느냐고 속상한 마음을 그대로 쓴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명은이만의 비밀이었다. 감독은 바로 그 지점에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명은이의 눈에 비친 가족은 바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가족의 모습 그대로이기에. 적당히 의지하면서 적당히 미워하는 존재인 가족. 가족 안에서도 갈등과 미움이 있지만 또한 서로에 대한 위로와 사랑이 혼재하는 가족의 모습을.   

  

처음으로 솔직하게 가족에 대한 명은이의 감정을 담은 글은 성원시 글짓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는다. 하지만 대상을 받은 작품이 신문에 실리면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명은이는 또 한 번 큰 고민에 처한다. 자신이 솔직하게 써낸 가족에 대한 글로 인해 가족이 상처받을까봐 겁이 난 것이다.   

   

명은이는 자신의 고민을 선생님에게 털어놓은 뒤 대상 받는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이 적힌 원고를 받아 뒷산으로 가 땅에 묻는다. 그것은 이제 마음을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은이가 그것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동차와 공장 굴뚝에서 시커먼 매연이 뭉게뭉게 나올 때 목구멍이 따가워 신음하는 하늘의 기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섬세한 감성을 가진 명은이는 이제 자신을 얽어매고 있던 가족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해소시키고, 글짓기로 받은 상장을 들고 시장에 있는 엄마 아빠의 젓갈가게로 찾아간다. 엄마 아빠도 그런 명은이를 받아들이며 딸을 칭찬해준다.     


〈비밀의 언덕〉를 보는 일은 추운 겨울날 양지에 앉아 따뜻한 볕을 쬐는 느낌이다. 우리가 한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어떤 비밀을 꺼내어 햇볕에 반짝반짝 말리는 일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성장해간다.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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