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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온 Jan 27. 2024

영화를 향한 첫사랑의 기억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토요일 밤 방송되던 MBC ‘주말의 명화’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지방 소도시에는 극장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하나밖에 없는 영화관 가는 일은 학교에서 금지하던 시절이었다. 텔레비전에서 상영되는 ‘주말의 명화’는 ‘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것을 금지하였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 상영되는 많은 영화들이 소위 ‘야한’ 장면이 있는 ‘성인 영화’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조금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주말의 명화’를 통해 영화를 보면서 그런 우리나라의 ‘금지’ 정책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편견인지 알 수 있었다. 힘들게 영화를 찾아보면서 오히려 영화를 더 사랑하게 된 한국의 ‘영화 덕후’는 그렇게 생겨났다.     


서울에 올라와 대학을 졸업하고 자취를 시작하면서 외로운 자취생의 주말은 영화 보는 일로 채워졌다. 당시 비디오가게에서 3~4편의 영화비디오를 빌려 보면 혼자 보내는 주말이 외롭지 않았다. ‘시네21’이나 ‘키노’ 같은 영화잡지를 비롯하여 당시 주간지 영화소개란을 열심히 탐독하여 스스로 선정한 영화들을 보면서 영화에 대한 사랑과 안목을 높여갔다.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부산시네필상을 받은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바로 그 시절 영화에 푹 빠져 열병을 앓듯 영화를 사랑하던 영화 덕후들 이야기다. 노란문은 90년대 초 영화 덕후들이 모여 영화를 보고, 공부하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영화연구소이다.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4개 부문 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이 당시 노란문 멤버였다. 스무서너 살이기에 가능한 푸릇푸릇한 열정이 느껴져 좋았다. 영화에 대한 대책없는 사랑이 느껴져 좋았다.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다큐멘터리에는 매우 귀중한 영화에 대한 자료와 그 시절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Looking for Paradise’다. 봉준호 감독이 독서실 총무 아르바이트를 하여 번 돈으로 카메라를 사서 만든 첫 단편이다. 15여 명이 모인 노란문 송년회 모임에서 개봉(?)을 한 20여 분짜리 짧은 이 영화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한국영화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은 감독의 첫 작품인 셈이다. 첫 영화는 첫사랑처럼 미숙하지만 그것이 있었기에 ‘살인의 추억’이라는 수작을 비롯한, 개성넘치고 선굵은 작품들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보고싶은 영화를 어렵게 구해 불법복제(!)한 500여 개의 영화 비디오테이프 목록이 빼곡이 적혀있는 ‘노란문의 영화 리스트’가 적혀있는 노트는 타임머신을 태워 우리를 다시 젊은 날의 열정 한가운데로 데려가주는 것만 같다. 영화에 대해서 함께 세세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같이 디테일하게 들여다본다는 것. 노란문에 대한 기억은 ‘같은 대상’에 대한 ‘사랑’을 나눌수록 서로 가까워질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처럼 보인다.     


당시 주류 영화산업 바깥의 20대 영화학도들이 뭉친 독립 영화 단체 ‘장산곶매’는 온 나라를 뒤흔든 영화 ‘파업전야’를 선보인 슈퍼스타였고, ‘해피엔드’ 등을 만든 정지우 감독 역시 90년대 대학가 스타였다고 한다. “장산곶매가 ‘프리미어리그’고 정지우가 있던 ‘청년’이 분데스리가라면 노란문은 조기축구회였죠.(봉준호 감독의 회고)”

  

데이 포 나잇(프랑스와 트뤼포), 안개속의 풍경(테오 앙겔로폴로스) 등 당시 영화에 목말라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보았을 영화 목록과, 영화에 대한 책이 별로 없던 시절 출간되어 영화 덕후들의 사랑을 받았던 《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 대한 이야기도 반가웠다. 2000년대 들어 한국영화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풍성하게 되고, 국제 영화제에서 주목받게 된 것은 모두 이러한 영화광들이 포진해있었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다소 지루할지도 모를 거라는 선입견을 깨뜨리듯 다큐멘터리는 잘 만들었고, 재미있었고, 의미있었다. 다큐의 첫 장면과 여러 부분에 등장하여 노란문 시절을 이야기하는 임훈아 씨는 아는 얼굴이고, 파란 상의에 선글라스를 쓰고 사진에 등장하는 이는 가까운 친구였다.    

  

영화를 두고 “생(生)을 걸어도 좋았다”고 말하는 노란문 회원의 말은 20대여서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봉준호 감독의 여정은 그 말이 현실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특별한 경우를 보여주었다. 꿈이 현실로 실현되기 위해서의 여러 과정과 조건들이 있었겠지만 말이다.    

   

‘사랑’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장면을 보는 일은 가슴을 뜨거워지게 만든다. ‘꿈’이 실현되는 장면과 이야기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영화를 향한 우리 첫사랑의 기억을 불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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