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들이 있었지

by 디디온

제미란이란 사람을 알게 된 것은 30대 초반이었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진행하던 북디자인 강좌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강의가 끝난 후 가진 뒤풀이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우리는 서로 이야기하다 ‘통’했다. 아주 빠른 속도로 우리는 친해졌다.


그녀를 만나고 너무 좋아 내가 혹시 여자를 좋아하는 동성애적인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그런 의심은 마침 그 무렵 내 앞에 나타나 구애를 하던 한 놈팡이에 의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서강대 근처 술집에서 연대 정문 근처 버스정류장까지 차로 바래다주던 모습, 술에 취해 고개를 젖히고 졸던 모습, 유로스타로 런던에서 파리에 도착한 나를 마중 나와 환하게 웃으며 안아주던 모습, 파리 근교 퐁트네 오 로제(Fontenay-Aux-Roses)에서 저녁을 먹고 산책하던 모습, 와인 마시며 웃던 모습, ‘봄날은 간다’를 부르던 모습, 내가 선물한 델리스파이스의 CD를 받고 즐거워하던 모습과 이제하의 ‘모란동백’ 앨범을 취하고 기뻐하던 모습, 홍대 카페 ‘키 작은 자유인’에서 만났던 모습. 인생의 밑바닥을 보고 올라온 듯 노회한 모습과 여전히 소녀 같은 모습을 동시에 지녔던 그 모습들.


루악 원두 100그램에 15만 원이 넘는다고 하자 가격 말고 그 커피의 맛을 이야기해 달라던,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서 보았던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열을 올려 이야기하던 나에게 ‘세상의 기원’ 근처에 걸려 있는 젊은 쿠르베의 자화상은 왜 보지 못했냐고 말하던.


뛰어난 지적감각과 미적감각을 가진 사람. 요리 못하는 미식가. 대학로 한 음식점에서 생감자를 아주 얇게 채 썰어 마요네즈에 버무린 것을 먹어본 것도 선배 덕분이었다. 한번은 평창동 한정식집에서 막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자리를 바꾸자고 했다. 바꾸어 앉았더니 내 자리에서 큰 통유리 창 너머로 울창한 나무숲이 보였다. 내가 좋은 풍경을 보며 식사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그날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뒤통수를 볼 수 있는 곳에서는 일을 하지 못한다며 사무실 대신 집에서 일을 했던 북디자이너. 어느 날 부암동 하림각 근처에 마련한 선배의 작업실에 갔더니 의상 디자이너로 변신해 있었다. 제주에 사는 천연염색 장인 장현승 씨가 작업한 천으로 만든 선배의 옷들은 디자이너의 강렬한 개성을 담은 작품처럼 보였다. 아시아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유니언 신학교 종신 교수가 되었으며《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등의 책을 펴낸 현경이 선배 옷에 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선배 옷에만 반했겠는가. 선배가 초대한 전시회 오프닝은 늘 맛있는 와인과 개성을 뿜어내는 사람들이 어우러진 즐겁고 신선한 시간들이었다.


부암동 산자락에 자신만의 작업실을 지어 초대하던 날, 나는 알았다. 나만 그녀에게 빠져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날 부암동 산자락 선배의 산방을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 ‘제미란교의 신도’들이었다. 그녀 주위에는 늘 새로운 삶을 꿈꾸며 기존의 질서에 길들여지지 않고 자신을 찾아나가는 매력적인 사람들로 넘쳐났다.


제미란을 사랑하던 시절은 갔다. ‘너만이 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내가 널 지지해 줄게’라는 선배의 말에 위로를 받았던 시절, 선배가 나에게《사람 풍경》을 주었다.《사람 풍경》은 나를 성찰하며 나를 바꾸어가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선배와 같이한 모든 시간이 아름답고 깊었고 의미 있었다. 이제는 내가 제미란에게 받은 것을 후배들에게 돌려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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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제대로 몸을 담궈 썩지 않고 삭는 곳에 아름다움과 기품이 담긴다 _ 황동규〈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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