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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Jun 06. 2024

그저 다 까먹었을 뿐인 나

저의 일기를 정리하고 공개합니다 2023년 12월

2023.12.07. 목요일


동구밭 샴푸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거품이 풍성하게 난다. 워커힐 어매니티... 이 말 너무 웃기다... 워커힐 비품이라 쓰자. 아무튼 비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가져와서 이제야 써 본다. 욕실 비품이 어느 브랜드일까 기대하다가 동구밭이라서 약간 김새는 기분이었는데, 환경을 위해선 옳은 방향이라 생각한다. 매일 수백수천 개의 객실에서 작은 플라스틱병들이 우르르 나오는 것보단 낫지.


어제 글쓰기 수업에서 요즘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이냐고 기습적으로 강사님이 물어보셔서 '전지적 독자시점'이라고 솔직하게 답했다.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역시나 그 자리의 아무도 몰랐다. 웹소설이고 초대박 작품이라고 민망하게 더듬더듬 설명했다. 옆자리 어린이(만 31세)가 "저 뭔지 알아요. 웹툰 조금 봤어요."라고 속삭였다. 강사님은 평생 그런 류(?)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을 것 같다.


장르소설이 아닌 책을 읽은 게 마지막으로 석 달 전이다. 장류진의 '연수'를 읽었습니다,라고 하면 좀 폼이 났을까.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나는 24권의 책을 읽었다. 기억엔 남는 책은 없으며, 심지어 읽은 책을 기록한 어플을 보며 '내가 이걸 읽었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경우로 남편과 올해 봤던 영화를 되짚다가 25주년 기념으로 재개봉한 타이타닉을 봤다는 기록을 보고 '내가 이걸 봤다고?'라고 생각했다. 리디북스 책장에는 완독 했지만 제목조차 낯선 작품이 다수 있다. 아 좀 심각한 듯. 약을 먹어서인지, 매사에 성의가 없어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어제 받은 호박인절미소보루는 그냥저냥이었다. 안에 들어있는 떡에서 창억떡집의 호박인절미 맛이 날락 말락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남편이 커피를 내려주겠다며 뭘 마시겠냐고 물었다. 나는 "카페인!"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남편은 "카페아웃!"이라고 외쳤다. 우리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정말 염치없는 개그다. 남편이 "이거 또 일기에 쓸 거지?"라고 말했고, 나는 "당연하지."라고 답하고 지금 쓰고 있다.



바닥에 누워 발라당 하는 치즈를 이리저리 쓰다듬다가 웃음이 나왔다. 치즈의 앞다리부터 뒷다리까지의 거리를 눈으로 어림잡는다. 예전에 동물병원에 갔을 때 의사 양반이 치즈를 더듬더듬 진료하며 "치즈는 긴 고양이잖아요."라고 말했다. 내 생각이 확신을 얻는 순간이었다. 치즈가 의자 등받이에 묶어놓은 노끈을 가지고 격렬하게 논다. 밤마다 낚싯대를 꺼내라고 시끄럽게 울고 막상 꺼내면 가버리면서. 


매체에 나오는 고등학생들은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말로 갈수록) 대부분 어른스럽고 용기 있다. 그리고 뭣보다 아무리 양아치라도 종례 시간에 교실을 돌아다니거나 떠들지 않는다. 교사에게 반항해도 주먹으로 위협하거나 쌍욕을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서 멀어진 어른들은 자연스럽게 고등학생들을 미화하고, 그 시절 자신의 미숙했던 모습을 지워버린다. 모두가 학교를 나왔는데 모두가 학교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모두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진다.


처음보다 조금 여유 있게 수영 강습에 임했다. 오늘도 물속에서 걷기, 파닥파닥, 꿀렁꿀렁 등을 연습했다. 킥보드를 잡고 한 바퀴를 돌자 강사님이 "잘하는데요!"라고 말했고, 한 바퀴를 더 돌자 "수영을 배웠었네!"라고 말했다. 20년 전이라고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에게 절대 기대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20년 전 자유형 반에서 하위그룹에 속해 있었고 그것이 마지막 수영이었다. 지금은 좀 괜찮아 보일지라도 한두 달이 지나면 강사가 미안한 얼굴로 "음 상급반에 못 올라가겠는데요."라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운동 덕분에 소화가 되는지 자꾸 은밀히 트림을 하며, 강사의 눈을 피해 열심히 할 것을 다짐했다. 옆 레일에선 산타모자 같은 수모를 쓰고 수염이 덥수룩한 강사가 힘차게 회원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안 되지만 수염은 노출되어도 괜찮나,라는 생각과 당근마켓에서 본 고양이 수모 사야지,라는 생각을동시에 함께 했다. 


락커 앞에서 옷을 반쯤 걸치고 로션을 바르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월수금 필라테스 하시는 분 맞으시죠?" 고개를 돌리자 하얀 얼굴에 유난히 밝은 갈색머리를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누구세요? 필라테스 수업에 저런 머리색을 한 사람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동네가 참 좁다는 농담을 나누고 웃으며 헤어졌다. 하지만 누군지 몰라. 


작년의 에인젤들을 만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벌써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까먹어버렸다. 작년엔 내내 마스크 쓴 얼굴만 봤는데, 올해 만나면 마스크가 없으니 더 알아볼 수가 없을 것 같다. "선생님!!"하고 뛰어오는 그들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주지 못하는 나의 멍청함은 성의 없음과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담임은 아니지만 수업했던 아이들이 다가온다면?(다가온다는 상상 자체가 나의 과도한 자의식일 수 있으나) 수업할 때도 다 못 외웠던 이름을 갑자기 기억해 낼 수 있을 리 없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면 아이들은 얼마나 실망하는지... 또라이들은 또라이들이라서 다시 만나기 싫고, 좋은 아이들은 실망시키기 싫어서 다시 만나기가 싫다. 곧 마흔인데 아직도 리셋증후군 상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반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절반 정도만 알고 졸업했다. 얼마 전 분식점에서 만난 ㄱ선생님을 보고는 아주 긴 몇 초간 눈으로 얼굴을 더듬어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결혼 후 명절에 부산에서 지하철을 탔을 때 남편과 비슷한 색깔의 점퍼를 입고 앉아있는 남자를 보며 계속 남편인지 아닌지 혼자 긴가민가해했다(이건 나도 좀 충격). 좋아하는 걸그룹은 많지만 영상을 수없이 봐도 멤버를 구분해 낼 수 없다. 여러 만화들을 읽다 때려치운 이유는 많은 인물과 이름들을 구분할 수 없어서였다. 나 같은 사람들이 있으니 '천사소녀 네티'의 세계가 성립되겠지, 하고 한숨을 쉰다. 


이 사진 정말 내 인생 같음



남편 피셜 30점짜리라는, 밖에 입고 나가면 안 된다는 바지를 입고 차를 운전해 오며 '꼭 이 바지를 버려야 할까? 이렇게 따뜻한데'라는 고민을 했다.



수영을 하고 온 날마다 남편은 유독 피곤해했다. 물장구 정도만 치고 왔는데도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다. 소파에 젖은 수건처럼 축축하게 늘어졌다. 



동생과 카톡을 하다가 문득 생각나서 물어보니 페이퍼타월 2장씩 쓴 단다. 나는 분개했다.


나의 코골이에서 탈출할 경우를 대비해서 남편과 신중하게 라꾸라꾸 침대를 골라 주문했다. 슬프다.


(집에서 집으로) 퇴근한 남편이 물었다.


남: 저녁은 뭐야?

나: 고구마 삶아줄 거야.

남: ......

나: 왜 슬퍼하지? 고구마는 맛있잖아.


너무 슬퍼하며 맛있는 걸 먹고 싶다고 해서 맥도널드를 먹었다(...) 왜지? 고구마는 맛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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