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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Jun 07. 2024

심각한 기억력

저의 일기를 정리하고 공개합니다 2023년 12월

2023.12.08. 금요일



어제 수영을 겨우 두 번 배우고 와서 수영복을 검색했다. 그래도 두 벌은 갖고 있어야 하지 않냐고 합리화하며. 두 번째 수영복은 현란한 것을 사리라. 



보육을 하기 싫어서 초등교사가 되지 않았고, 상식을 가르치기 귀찮아서  중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시대의 고등학교는 보육, 상식 주입, 진학준비 모두를 해야 하는 곳이었다. 자꾸 트위스트를 추게 된다. 아아~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 추면서.



이름과 얼굴을 외우지 못해 곤란했던 일들이 또 생각났다. 


어느 날 친구와 산책을 하다가 중랑천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저씨를 보며 우리 아빤가 한참 고민했다. 결혼 전 친구들과 남편을 서로 인사시킬 때 갑자기 Y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머리가 하얘져 말을 못 했다(지금도 미안한 일). 세상의 모든 차가 다 거기서 거기로 보여서 내 차를 5년쯤 타고 나서야 특유의 엉덩이 모양을 알아보게 되었다. 수능 때 수험생과 사진을 대조해 보며 감독관 도장을 찍었지만 보여주기식 행위일 뿐 내 눈깔은 동태눈이었다. 그러다 한 학생이 사진과 일치하지 않는 것 같아 동료 감독관에게 물었다가 "완전 똑같구먼."하고 핀잔이나 들었다. 가만히 있을 걸! 벌크업한 송강 사진을 보고 이제부터 차은우 다음으로 송강을 좋아하기로 했다. 그러나 누가 사진 밑에 '송강'이라고 크게 써놓지 않는 이상 그를 다시 알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복작복작한 단체생활 속에서 익명의 학번으로 지내다가 이름이 불리고 기억되고 싶은 아이들의 그 새순 같은 마음을 안다. 아는 데 내 기억력은 형편없다. 그래서 아이들이 "샘, 제 이름 뭐예요?" "제 이름 아세요?"라고 물을 때마다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매일 부르던 이름과 보던 얼굴도 그렇게 물어보면 일순 숨이 턱 막혔다. 태연하게 대답해도 내면에선 외줄 타기를 하고 있었다. 가끔씩 틀리면 내가 이름과 얼굴을 얼마나 못 외우는지 주절주절 설명하기도 했는데 아이들은 실망한 티를 숨기지 않았다. 내가 학생이라도 그런 말은 안 믿었을 거다. 정도껏 기억력이 나빠야 설득이 되지. 내가 경찰이면 아무리 CCTV가 많아도 범죄예방에 소용이 없었을 거다.



점심을 먹고 예약한 미용실에 갔다. 가면서 도로 여기저기에 떨어진 쓰레기에 화가 났다. 도로에 뭐 떨어뜨리지 말라고! 혹시나 무언가의 사체일까 봐 쳐다보고 싶지 않지만 안전을 위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이 괴롭다. *****가 ****모습, ***가 도로변에 얌전히 포개져 **** 있는 모습, 갑자기 시내 도로 한가운데에 개가 서 있었던 일 등등이 잊히질 않는다. (개는 별일 없었습니다. 안심하시길.)


원래 계획은 1년 동안 머리를 기일게 길러서 옴브레 염색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년 동안 머리카락은 겨우 어깨를 넘겼고 그중 반절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가 되었다. 과감히 옴브레 염색의 꿈을 버리기로 했다. 사실 그걸 할 돈도 없다. 그래서 리프컷으로 싹둑 잘라달라고 말했다.


거울을 보니 갑자기 없던 오빠가 생긴 기분이었다. 미용사가 "지금까지 중 제일 짧게 자르신 거죠?"하고 물어왔다. 귀염성 있고 말도 긍정적으로 예쁘게 하는 (시술 중 말을 걸지 않는!) 그녀는 몇 달에 한 번씩 띄엄띄엄 오는 나를 기억하고 있다. 출산으로 4개월 쉬고 최근에 돌아왔는데 "애기가 애기를 낳았네요."라는 말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눌러 넣었다.  그녀는 "출산도 살면서 한 번 해볼 만하네요"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낮지만 굽 있는 구두를 신고 하루종일 서 있다. 쉴 새 없이 섬세하게 손을 움직인다. 그녀에게 나를 대입해 보니 벌써 오전만 일하고 도망갔다. 도망가지 않는다면? 처참한 기억력으로 단골들을 실망시킨다. '기억을 못 해서 죄송합니다. 고의가 아닙니다.'라는 현수막을 걸고 영업한다. 여기까지 상상하고 그만뒀다.


미용사님이 머리를 감겨주시는 동안 어깨와 목에 힘을 빼고자 애썼다. 무의식 중에 자꾸 힘을 주는 게 습관이다. 물리치료사는 내가 상체로 걷고 있다고 했다. 필라테스 선생님은 항상 어깨가 솟아있다고 지적한다. 어깨와 목근육으로 모든 것을 당겨 버티며 그 아래 근육들을 물렁물렁하게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머리는 내 예상과 다르게 완성됐다. 미용사님은 죄가 없다. 죄는 내 얼굴에 있었다. 얼굴이 조금만 덜 길었어도(부들). 차에 타서 셀카모드로 날 보니 영락없이 '부동산 운영하는 젊은 여사장님' 느낌이었다. 크흡. 그렇게 설명하니 동생이 너무 궁금해해서 셀카를 찍어 보냈다. 웃음은 있되, 그 이미지를 부정하는 위로는 없었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버섯 같지 않아?'하고 물었다. 귀엽고 예쁜데 그렇긴 하단다.



예전 고3을 함께 했던 선생님들이 이번 겨울방학 때도 만나자고 즐겁게 카톡방에서 이야기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총무이기 때문이다. 개최하기 귀찮다(...) 만사가 귀찮다. 만남이 간절한 누군가가 나서주면 좋겠다.



글쓰기 교실에서 만난 어린이는 할아버지가 너무 요양병원에 들어가기 싫어하셔서 자기가 맡겠다고 나섰었다고 했다. 어머님은 늘 나이가 들면 알아서 요양병원에 들어가실 거라고 하신다. 나는 2천만 원을 들고 스위스에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남편이다. 남편은 영원히 살고 싶다고 한다.



커뮤니티를 하다가 아래 글을 발견했다. 한창 우울할 때의 내 마음과 똑같았다.



여전히 다 그만하고 싶은 건 같은데, 사라지고 싶은 정도는 아니다. 심할 때는 여기저기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두려워. 다들 괜찮니"하고 물어가며 혼자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주저앉았다. 지금도 두려움은 그대로지만 '될 대로 돼라'라며 소파 위를 구르고 있다.



저녁으로 어제 거부당한 고구마를 삶아 먹었다. 이렇게 맛있는데 왜 거부하지? 




머리가 빨리 자라지 않아서 옴브레 염색을 포기했다는 내 말에 남편은 "야한 생각을 많이 하면 되지."라는 고전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나는 "열라 많이 하지. 밤에 자기 전에 꼭꼭 19금 만화 읽고 자는 거 몰라?"라고 답했다. 



내 맘대로 내일은 '슈레기의 날'이라 선포했다. 알아서 자고 싶은 만큼 자고, 알아서 밥 챙겨 먹고, 집안일하지 않고 슈레기처럼 알아서 노는 날이다. 남편은 서로 대면대면하게 있는 거냐며, 이동할 때도 말할 필요가 없는 거냐고 시무룩해했다. 그래서 그건 아니고 나태할 뿐이라고 잘 설명해 줬다. 잘 자고 규칙적으로 일어나 삼시세끼 잘 챙겨 먹는 게 너무 지친다고(세끼를 다 준비하면 중간에 놀아도 논 것 같지가 않고 밥 먹고 돌아서자마자 또 밥 준비하는 느낌이 든다). 편의점에 가서 각자 내일 아침과 점심에 먹을거리를 골랐다. 남편은 '슈레기의 날'의 필요성을 다 이해하지 못한 듯 하지만 나는 설렌다.


매일 2000~5000자의 일기를 쓰며 1~2시간을 소비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한가해서 할 수 있는 일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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