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다시 만나자, 우리들
집사가 되는 순간, 이별을 향하는 시곗바늘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지만 왜 이별은 늘 무겁기만 한지요. 소중한 이와의 이별은 마치 심하게 몸을 움직인 다음 어김없이 찾아오는 헐떡거림과도 같습니다. 결코 피할 수 없는데다가 겪으면서 차차 무뎌지는 것뿐, 매번 고통스러우니까요. 그래도 당장 아무리 숨이 턱에 닿고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뛰더라도 그 상태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두렵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모디와의 이별로 인한 슬픔은 아직 찾아오지조차 않았음에도 두렵고, 찾아왔을 때 제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두렵기만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모디와의 이별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저는 스스로를 ‘생각을 거의 멈추어 버린 쪽’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정말로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평소에 그런 쪽으로는 방향을 잡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지요. 언젠가 다가올 일을 회피한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완전히 피하려고 한다기보다는 십수 년에 걸쳐 아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준비를 해 나간다는 뜻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별을 항상 인지하고 있기에는 제 정신이 버티지를 못할 것 같거든요.
저는 본질적으로 유신론자입니다. 최근에는 불가지론 쪽으로 기울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신의 존재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을 버릴 수 없다고 해야겠군요. 제게는 고양이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맹목적인 확신이 있답니다. 반려동물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신 분들도 내심 저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시리라 봅니다.
죽고 나서 고양이별에 가면, 모디에게 살아 있을 때 미안했다는 말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저를 늘 괴롭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나이가 더 들고 여유로워졌을 때 모디가 들어왔다면 지금보다 훨씬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하필이면 별볼일없는 집사를 간택하는 바람에, 크나큰 호사를 누려 보지도 못하고 7년 가량을 보내게 만들었다는 것이 어처구니없게도 매일 슬픔을 가져다 주지요. 좀 더 좋은 곳에서 살 수 있었더라면, 애초에 지금 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늘 있답니다. 성질은 더럽지만 너무도 착하고 사랑스러운 모디는 단 한 번도 집사를 원망하지 않았겠지만요.
어쩌면 과거의 제게는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면서 경험을 쌓을 기회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미래의 제가 더 많은 것들을 움켜쥘 기회들이 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모디와 함께할 시간이 줄어들어야 할 테고, 그것을 무릅쓰고 원하는 일들을 이루어내고 나면 어느새 모디는 늙어 있겠지요. 나중에 스스로의 나태함이나 한계를 책망하게 되더라도 저는 모디를 외롭게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포기할 것들이 있다면 포기하고 모디와 조금이나마 더 같이 있어 주는 것이, 한심한 집사의 죄책감을 덜어내는 방법입니다.
맞아요, 제 입장에서만 생각한 아주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정작 모디는 제가 그랬다는 것을 알면 슬퍼할 테니까요. 그래서 고양이별에 가서도 모디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집사가 왜 저러나 궁금해하는 모디 앞에서, 조금 더 잘해주지 못하고 힘들게 살도록 해서 내내 죽도록 미안했다고 끝없이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이것도 이기적인 생각인 것은 마찬가지지요. 결국 지금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는데도 모디에게 용서받고 싶은 마음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런 저를, 모디가 용서해 줄까요?
모디가 저를 용서해 준다면 하루종일 함께 놀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싶습니다. 우선 아무 걱정 없이, 아무 할 일도 없이 모디를 얼굴 옆에 놓고 늘어지게 잠을 자려고 해요. 자다 깨면 살아 있을 때와 다름없이 따뜻하고 고소한 털냄새를 맡을 수 있고, 촉촉한 코에 제 코를 대볼 수 있고, 젤리도 만지작거릴 수 있겠지요. 모디는 얼굴을 찌그러뜨리고 기지개를 켤 테고, 고롱거리면서 춥춥이도 할 테고, 제 배 위에도 올라와서 냐옹거릴 것이고요. 불의의 사고가 없다면 다시 만나는 것은 몇십 년이나 걸릴 텐데 그 감동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리고 고양이별에는 모디가 마지막으로 저와 동거인과 함께 살던 집이 똑같이 마련되어 있었으면 합니다. 둘 다 가장 편하게 느꼈을 장소에서 밥과 간식을 먹고, 잠을 자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우리 둘 다 더없이 기쁘겠지요. 따로 일하러 나가거나 하지 않아도 되니 더 알차면서도 게으르게 늘어진 채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테고, 그것이야말로 모디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만약 그 집에 정원이라도 있다면 의자를 내놓고 모디를 다리에 올려놓은 채로 앉아서, 해가 뜨고 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싶습니다. 혹은 별이 빛나는 광경을 보아도 좋겠고요. 빛에 따라 모디의 수염 끝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노라면, 영원과도 같은 하루가 시작하고 끝나는 것을 보노라면 감사함으로 매순간 가슴이 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동거인보다 제가 나이가 많아 더 빨리 고양이별에 가게 될 테니, 동거인이 올 때까지 둘이서 기다리다가 그 후로는 셋이서 즐겁게 뒹굴뒹굴 놀면 되겠지요. 죽고 나면 전부 무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고양이별이 있다고 믿는 제게는 무라는 개념이 전혀 와닿지 않는군요. 저는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찬, 진정한 유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가 고양이별에 들어갈 자격을 갖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고양이들이야 아무 죄가 없으니 바로 여기보다 행복한 곳으로 가겠지만, 저는 그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렇게 될 경우 차라리 모디가 저에 대해서 기억조차 하지 못했으면 합니다. 다른 집고양이들은 하나 둘 생전의 자기 집사를 만나 부비적거리는데, 모디만 우두커니 홀로 앉아서 기다리도록 만들고 싶지는 않거든요. 제가 기억하고 있으니, 모디가 저를 기억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제가 모디의 몫까지 사랑하고 있으니 모디는 그저 고양이별에서 실컷 행복을 누리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회한이라는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지경으로 몰아치면서도 절대 저를 붕괴시키지는 않는 회한이요. 그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조금만 스스로를 돌아보았다면 모디와 저곳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제 발에 도끼 찍은 꼴이 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고양이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언제나 더 베풀고, 주위를 돌아보고, 자신만을 위하지 않는 삶을 살도록 부단히 애써야 하겠습니다.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장입니다. 쓰면서 울고 또 울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더 이상은 너무 힘드니 얼른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그래도 다 쓰고 나니, 모디가 고양이별로 떠나면 저만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제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믿기에 이별 자체가 두렵다기보다는 추억만을 되새기며 살아야 하는 공허한 시간들이 두려운 것이지요.
또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은 죽음이 아닌, 죽어서도 모디를 만나지 못할 가능성을 두렵게 만듭니다. 지금은 어려울지라도 나중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두려움이기는 하지만요. 삶을 유지하고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별을 되도록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옳겠지만, 정말로 이별이 찾아왔을 때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간간이라도 그에 대해 숙고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직은 한참 남은 일인 만큼 저도 그동안 더 강해지고 성숙해져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