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와 바퀴벌레 챌린지의 끔찍한 혼종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고, 이성은 말합니다. 그러나 감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퀴벌레와 고양이의 생명의 무게는 분명 같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둘을 동등하게 대우할 수 없습니다. 평등함과 동등함은 다르니까요. 둘을 비교할 수 있는 기준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외모가 가장 대표적인 기준인 것은 분명합니다.
바퀴벌레는 제 기준에서, 솔직히 말해 몸서리가 쳐지는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고양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요. 외모에 따른 판단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는 살면서 수없이 느꼈지만 이것은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바퀴벌레와 마주치면 본능적인 거부감이 이성을 넘어섭니다. 소리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돋고 잠까지 설칩니다. 위생이나 질병에 대한 걱정도 들기 시작합니다. 제발 눈에만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빌면서도 집안 어디선가 돌아다니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은 불편하기만 합니다. 이런 바퀴벌레가 고양이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니, 근본적인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과연 이것이 올바른 생각인지에 대해서는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이름 모를 갑충으로 변하는 상상보다 훨씬 더 가슴 아픈 상상, 즉 모디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바퀴벌레로 변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부드러운 털도, 말랑말랑한 발바닥도, 촉촉한 코도, 쫑긋거리는 귀도 더 이상 없습니다. 오로지 단단한 껍질, 가시 돋친 다리, 끊임없이 위아래로 흔들거리는 더듬이, 버석거리는 날개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 저는 의심의 여지없이 비명을 지를 겁니다. 모디가 웅크리고 자고 있던 이불 위에 거대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는 모습은 제가 드디어 지옥에 떨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바퀴벌레는 칭얼거리면서 제게 다가옵니다. 끔찍한 소리를 내며 제 배 위로 기어오르려고 하는데 더듬이가 얼굴을 찌르고, 턱이 짜각거리는 소리가 귀에 꽂히고, 다리의 가시들 때문에 이불과 제 옷은 구멍투성이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 껍질, 번들거리고 번쩍거리는 껍질입니다. 아마 정신을 놓고 기절하거나, 제압을 하려고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정황을 고려했을 때 이 바퀴벌레는 임의의 바퀴벌레가 아닌 모디가 변한 바퀴벌레인 것이 분명합니다. 푸르르륵 하는 끔찍한 소리를 내면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날개가 달려 있지만 이것은 모디가 분명합니다. 집사의 다리에 올라와서 잠들고 싶어 하고, 집사가 사랑을 담아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고, 맛있는 간식도 배불리 먹고 싶어 하는 모디입니다. 단지 겉모습만 다를 뿐 여전히 모디인 이 바퀴벌레를, 저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니 어떻게든 데리고 살아야 할까요. 어쨌든 바퀴벌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할까요. 만약 모디가 잠을 막 깨서 비몽사몽이라 자신이 그렇게 변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라면 어떨까요.
이런 상상은 터무니없기는 하지만 스스로에게 커다란 질문거리를 던져 줍니다. 저와 동거인이 어떤 이유로 모디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요. 사람의 관점에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고양이라서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를 다시 묻게 되지요.
이 문제에 대한 저와 동거인의 대답은,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하겠다는 다짐으로 끝납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둘 다 바퀴벌레라면 특히나 학을 떼는 사람들이기에, 그 상황을 머릿속으로 구성해 보면 거부감이 느껴진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디를 그레고르 잠자와 견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 실존의 문제가 아니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반려동물의 문제이니까요. 실존이라는 개념이 사람으로서 탐구해야 할 종류의 것이라면, 반려동물의 경우에는 적용이 불가능하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고양이는 늘 자기 자신으로 살고, 아마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니 겉모습이 바뀌었다고 해서 모디를 배척한다면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게 되겠지요. 이유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배신을 당하는 느낌일 테니까요. 모디가 자신이 바퀴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도 그렇습니다. 화들짝 놀라 세간살이를 다 부수고 다니겠지만 어쩔 수 없지요. 스스로 받아들일 때까지, 평소와 같은 방식으로 대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의무라는 관점에서도 결론은 마찬가지예요. 모디가 단지 제게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서 함께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개인적으로, 모디는 제가 다른 생명을 책임질 만큼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길바닥에서 겁에 질려 있던 모디를 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디가 저를 구했기 때문이랍니다. 평화와 안식의 결정체,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 준 모디는 고양이이기 이전에 제 자식이나 마찬가지지요. 그 두툼한 뱃살 안에 숨기고 있는 지고의 선함이 있기에 사랑할 수 있고, 저에게는 그 선함이 가져다 준 모든 행복한 일들을 잊어버리지 않을 의무가 있습니다. 모디가 집으로 들어와서 자유를 포기하고 자식같은 존재가 되어 준 데에 최선을 다해 보답할 의무 말이지요. 먹는 것이 달라지고, 생활 방식이 달라지고, 집의 분위기가 달라지겠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모디를 데리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이제 또 한 가지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디가 변한 거대 바퀴벌레 이외의 다른 바퀴벌레들은 왜 모디처럼 대할 수 없는지에 대한 문제이지요. 크기가 다를 뿐 외형은 같을 것인데, 외모가 대우의 차이에 그렇게 큰 영향을 준다고 써 놓고 이제 와서 그것이 말이 되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요. 바퀴벌레들이 실존의 문제에 대해 알 리도 만무하고, 그들도 애초에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다는 의도가 아닌 생존을 위해 행동하는 것뿐이니까요.
전제를 확실히 해야 하겠습니다. 그 바퀴벌레가 모디라는 확신이 있어야 사랑할 수 있다고요. <맨 인 블랙>에서처럼 바퀴벌레 외계인이 모디를 집어삼키고 그 행세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만약 그것이 모디가 아니라면, 정말 가차없이 행동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존재는 모디가 아니니까요. 결국 저는 모디가 고양이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기보다는 그저 모디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군요. 위에 쓴 모든 말들은 비록 바퀴벌레로 변했어도 원래는 모디였다는 전제가 있어야 납득 가능해지는 말이었습니다. 모디가 지금 고양이라는 사실이, 바퀴벌레 외계인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변신>이 허구의 이야기라는 사실이 너무나 다행으로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