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고말고요 아무렴 그렇고말고요
흔히 고양이를 아무 쓸모도 없는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함께 살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쓸모가 없습니다. 모디가 특히 더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쓸모란 개념을 가시적인 것, 물리적인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비가시적인 것, 정신적인 것으로 범위를 넓혀 본다면 이보다 더 쓸모 있는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모디가 집에 눌러앉은 2017년 가을 이전과 이후의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점을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단 한 번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던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좋아졌거든요. 모디가 그렇게 뻔뻔스럽게 제 방에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훨씬 더 불안하고, 우울하고, 스스로를 좀먹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고양이는 정신적 쓸모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 뻔뻔스럽다 해도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디는 스스로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모양입니다. 몸단장을 할 때도 그렇고, 애교를 부릴 때에도 자신의 지극한 사랑스러움에 확실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그래서 사랑받아 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할 때만큼은 열과 성을 다해 스스로를 아껴 줍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에 등장하는,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라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모디의 입장에서는 ’인간‘ 대신 ’고양이‘를 집어넣어야 하려나요. 고양이는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고 거기에 수염 끝만큼의 의심도 없기 때문에, 넘쳐나는 사랑을 집사에게도 줄 수 있으니까요.
흔들림 없이 외길을 걸어가는 이는 아름답습니다. 억지로 노력하지도, 자기 안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지나치게 갈구하지도, 타인을 깎아내리면서 자신을 높이려고 하지도 않고 목표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그의 모습은 경이롭기만 합니다. 모디의 목표는 단 하나,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이고 그 명쾌한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집사의 삶에 혁명과도 같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모디를 포함한 모든 고양이들은 세상에 내려올 때 그런 경이로운 사명이라도 띠고 온 것일까요.
살다 보니 세상에는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매일 새로 깨닫습니다. 막 시작하는 일들은 더하지만, 반복적으로 하던 일들도 집중력을 조금만 놓으면 바로 실수를 하거나 아예 망쳐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또한 쉬운 방법을 택하면 당장은 편하더라도 결국에는 밑천이 드러나 다시 기본부터 닦아야 합니다. 이미 시간이 꽤 흘렀고, 잘못되었기는 하지만 어쭙잖은 요령은 있는 상태이기에 처음에 비해 몇 배는 더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지요. 게다가 쉬운 방법을 자유롭게 택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많지도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모디는 사람인 저와는 다르게 아주 쉽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쉽게 간식을 얻어 내고, 따뜻한 잠자리를 차지하며, 배불리 먹고 즐거움을 누립니다. 모디가 제게 그 어떤 물질적 도움이나 실용적 이득을 직접 가져다 주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먹고 살기 빠듯한 요즘, 중년에 접어드는 만큼 의젓하게 살림에 보탬이 되려는 모습을 보이면 좋을 텐데 그저 집구석에서 뒹굴거리는 것밖에는 모르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는 다 모디라서 가능한 일이니, 행여나 투덜거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과 혁명이라는 사명을 띠고 지상에 온 녀석인데, 어떻게 불평을 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피곤에 절어 집에 들어와도 크게 울며 반겨 주는 모디를 보기가 무섭게 기력을 회복하게 되니, 그야말로 은총이 따로 없습니다. 삶에서 번잡스러운 일들을 추구하지 않는 모디는, 다른 일들에 투자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스스로 잘 할 수 있는 일에 있는 힘을 다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제가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의지를 북돋아 줍니다.
하루도 자신만의 일정한 생활 양식에서 벗어나지 않고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의 기본부터 충실히 다지는 모디는, 알고 보면 결코 쉽게 살고 있지 않답니다. 언뜻 원하는 것들을 아무 어려움 없이 얻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디는 매순간 집사가 몸과 마음을 움직여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무언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즉 모디는 일종의 장인, 아니 장묘입니다. 타고난 재능과 부단한 수행이 합쳐진 결과물이랄까요.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의식주를 보장받고 하루를 풍족하게 마칠 수 있는 것입니다. 간결한 목표를 세워 자신이 가장 자신있다고 믿는 일을 꾸준히 지속하면, 그 모습을 보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게 그 영향력이 미치게 되어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내게 되나 봅니다. 자신을 바꾸는 것은 그저 변화이지만, 타인을 바꾸는 것은 혁명입니다.
모디는 자신이 무언가를 원할 때 늘 진심으로 그것을 추구합니다. 저나 제 동거인이 간식을 꺼내면 집이 떠나가라 우는데, 실상은 어서 내놓으라는 협박이겠지만 겉으로는 몹시 애처로운 듯이 졸라댑니다. 눈까지 꾹 감았다 뜨면서, 커다란 배가 쑥 들어갔다가 튀어나오는 복식호흡으로 자기가 지금 간절하게 간식을 먹고 싶다는 사실을 우렁차게 전달합니다. 자신에게 관심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서운함 역시 정말 강하게 표현해요. 꼭 집사들이 가장 아파하는 부위, 발가락 끝이나 종아리와 같은 부위를 경고성 소리를 내며 살짝 뭅니다. 물면서도 섭섭하다는 말은 해야겠는지 무는 동시에 울기 때문에 와우와으악 하는 소리를 내게 되는데, 얼른 하던 일을 멈추고 놀이를 시작하지 않으면 신성모독죄로 큰 벌을 받게 됩니다.
할 말 다 하고 사는 모디,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 모디,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얻을 때까지 집요하게 달려드는 모디를 보면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되짚어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 안에서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해서 언성을 높이거나 타인을 깨물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돌아보면 귀찮아서, 혹은 두려워서, 혹은 타인의 생각이 부담스러워서 포기한 일들과 사실은 간절하지 않았다고 합리화한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남의 눈치를 참 많이도 보고 살았지요. 이렇게 행동하면 누가 좋아하고 싫어할지, 괜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이는 건 아닌지를 과도하게 걱정했어요. 지나고 나면 아쉬움만 남을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요. 조금 전에 이야기했듯 우리는 사람이기에 고양이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눈치를 보아야 할 때도 있고, 후회가 남는 일들도 분명히 생기고, 최소한이라도 타인을 의식하지 않으면 인간관계가 엉망이 됩니다. 자칫 타인에게 상처나 피해를 줄 수도 있고 자신이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행위에 따른 책임을 자각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는 뭐든 원하는 일이 있다면 용감하게 도전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저부터 더 용감해져야겠지요. 태생적으로 겁쟁이인지라 쉽지는 않을 것 같지만, 모디와 함께 지낸 몇 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으니 앞으로는 더 용기를 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모디는 단순합니다. 너무 단순해서 때로는 좀 안쓰럽기도 합니다. 잘난 것 하나 없는 집사 품에 안겨서 제가 세상의 전부라도 되는 양 칭얼거리는 모습을 보면 말이지요. 집고양이는 평생 아기나 다름없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아기가 엄마 없이는 살아가기 어렵고 엄마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강한 애착을 보이며,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는 거부감을 보이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기는 아직 성장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어른보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구분을 더 명확하고 단순하게 지을 수 있습니다. 고양이들에게도 좋음과 싫음, 두 가지의 가치를 구분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나 봐요. 그리고 그 가치 기준 외 다른 것들은 그저 지나가는 일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전에 살던 집은 아주 낡아서 여러 문제들이 있었고, 저는 그곳에 살던 4년 동안 행여나 어디가 또 고장이라도 나는 것이 아닐까, 집주인과 마찰이 생길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겨울은 어떻게 버텨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런데 모디는 여기에서나 그곳에서나 자기 삶을 똑같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디가 집사와 함께 있는 곳이 좋은 곳이라는 논리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역사적으로 단순하게 살려 노력했던 이들은 모두 어떤 이치를 깨달은 현자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복잡함과 단순함의 경계는 그만큼 심오한 영역에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심각하게 여기고 반응하는 일들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님을, 그분들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세상은 인과관계에 의해 움직이지 상관관계를 따르지 않으며, 같은 시간 속에서도 언제든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인 분들이니까요. 모디는 사람의 말을 하지 못할 뿐이지, 어쩌면 저 작은 털복숭이 머리 안에서는 엄청난 철학적 사고의 장이 펼쳐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가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까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집사의 모습은 깨우친 고양이 모디에게는 가엾고 딱한 자, 그 자체일 것입니다. 사람은 사회 안에서 좋아도 싫어하는 것처럼, 싫어도 좋아하는 것처럼 행세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적어도 일반적인 경우의 어른이라면 누구도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없고, 싫어하는 일을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지요.
그러나 깨달은 자들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내용은, 좋은 것에는 확실히 좋음을 표현하고 싫은 것에는 용감하게 싫음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자가 되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확고함, 그리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유연함이 단순함에 다가가는 첫걸음이며, 삶의 모양새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과정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디와 함께 있는 곳은 어디든 좋은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논리를 가지고 평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렇듯 모디는 참으로 쓸모가 많은 고양이입니다. 모디에게는 큰 빚을 지고 있는데, 모디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그것을 빌미로 저와 동거인에게서 더 많은 간식을 뜯어내려고 생색을 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