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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카레 Jul 23. 2023

유연함에 관하여

쭉쭉 늘어나냥


 모디는 정말 유연합니다. 몸이 유연한 것은 당연지사, 마음도 더없이 유연하지요. 대체 어디까지 늘어나는지 알 수 없는 투실투실 뱃살과 볼살, 날렵하고도 부드러운 다리와 더불어 정신까지도 치즈마냥 잘 늘어나니 부럽기만 해요. 한편 냥BTI에서 나왔듯이 모디는 아주 효율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대체 누가 그렇게 유연함을 갖추고 살라고 가르쳐 준 것일까요. 저와는 말이 통하지도 않는데다가, 제가 꽤나 고지식한 사람이라 일단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같이 산 지 얼마 안 되는 동거인에게 배웠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요. 타고났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저 유연함은 아마 고양이 종족만의 특성이거나, 아니면 모디가 혼자서 잘 발전시킨 성질일 테지요.




 유연함은 상황에 맞게 자신이 쓸 수 있는 방법들을 취하되, 최선을 다해 하나하나의 과정에 임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를 읽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무인이기도 하고, 사나이의 로망을 실현하고 싶기도 했지요. 병법 ‘이천일류’의 내용과 함께, 목숨을 건 수많은 결투를 거치며 깨달은 점들을 서술한 <오륜서>는 무술인들뿐 아니라 경영자들에게까지도 폭넓게 읽히고 있습니다. 이 <오륜서>에 나타난 삶의 지혜를 한 단어로 줄이면 바로 유연함이 된다지요. 그 분석이 과연 옳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오륜서>는 애초에 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책에는 결투에 임하는 자세와 훈련법, 무기 운용법들이 등장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지침들은 목숨이 왔다갔다할 일이 거의 없는 현대인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자세, 사람을 대하는 방법, 장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법으로 단어만 바뀌어서요.


 무사시가 말한 유연함은 기회주의와는 다릅니다. 기회를 포착하려는 모습과 기회만 포착하려는 모습이 아주 다르듯이요. 단 하나의 특성도 허투루 쓰이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자세가, 자신의 역량은 닦지 않은 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타인이 만들어 준 기회에 숟가락만 얹으려고 하는 자세와 같을 리 만무합니다. 이천일류가 주장하는, 결투 시 두 개의 칼을 상대에게 겨눔으로써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하는 일은 다가오는 승기를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필사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긴 칼과 짧은 칼 둘 다 각각의 쓰임새가 있으니 그에 맞게 최선의 행동을 하면 사고와 시야가 보다 넓어지게 되니 그야말로 합리적이지요.


 모디는 자신이 포착해야만 하는 기회를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기회주의적이지는 않습니다.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최대한 집사들에게 많은 애교와 사랑을 줌으로써 집사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자연스럽게 원하는 것들을 쟁취하니까요. 천하제일의 단계에 오른 귀여움을 통해서 말입니다. 게다가 모디는 부비적거리거나 집사를 핥아 주거나 뱃살에서 쿠리쿠리한 냄새를 풍기거나 젤리에서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등 스스로가 가진 모든 특성을 전부 사용합니다. 단 하나에도 흐트러짐이나 소홀함이 없이 온몸을 무기로 만들어냈지요. 냥생의 초반부를 거치면서 갈고 닦은 자기만의 간결한 동작과 소리를 통해, 장점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집고양이로서의 삶을 살아내고 있답니다. 자칫 기회주의로 변질되기 쉬운 유연함을 그동안 놓치지 않고 살아온 모디가 대견하기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와 동거인이 매일 모디에게 홀려 있지도 않고 성심을 다해 돌보아 주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만일 모디가 집사들을 존중하기까지 한다면 미야모토 무사시와 같은 경지에 올라 자기만의 <오륜서>를 집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우 왜 이렇게까지 늘어나냐.




 유연함은 한편으로 단단함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모디는 정말 액체가 아닌가 싶을 만큼 어디에나 들어가고 어디든 통과하며, 어디서나 편안하다면 자기 몸을 맞춰 잘 뒹굴거릴 수 있습니다. 그 부드러워 보이기만 하는 모디가 지금껏 서열 1위이자 패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험난한 단련을 버텨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집사들에 비해서 확실히 약하고 작음에도 우위를 점해서 유리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단단함이 꼭 필요했겠지요. 언제나 유연하지 못한 단단함은 부서질 뿐이고, 단단하지 못한 유연함은 무력할 뿐이니까요. 무사시의 유명한 격언인 ’천 일의 연습을 단이라 하고, 만 일의 연습을 련이라 한다.‘는 말은, 유연함을 갖춘 뒤에는 반드시 승리를 위해 단단히, 꾸준히 노력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일들, 집사들을 단호하게 응징하거나 매일 같은 삶의 방식을 꿋꿋이 반복하는 일 또는 자기주장을 강하게 피력하는 일이 모디의 단단함에 해당합니다. 제가 너무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옆에 와서 가르랑거리며 저를 위로해 주었던 일, 제가 이전 집에 대해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때 아무 어려움 없이 적응해서 건강하게 살아 준 일, 환경이 바뀌어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늘 한결같이 살아가는 일도 단단함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무엇보다도 저를 따라오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겨 간택까지 이루어낸 일이 첫째 단단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전에 배운 것들로 형성된 직감과 매순간 판단하고 적응함으로써 새로 배우려는 노력이 결합된다면 무슨 일이든 도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사람이나 고양이나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무사시는 단단함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치는 것과 닿는 것의 차이를 숙고했고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치는 것은 작정하고 상대를 제압하려는 확고한 마음가짐이지만 닿는 것은 어쩌다가 얻은, 얄팍한 마음가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확실하게 치기 위해서는 엄격한 수련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디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남김없이 쓰는 동시에 그 행위가 단순히 과정에 머물도록, 혹은 운에 의한 결과로 남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결과를 내고, 이 결과는 모디의 강렬하고 단단한 행동으로부터 나오지요. 힘과 매력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자기 뱃살마냥 말랑하게만 지낸다면 유연해지기는커녕 유약해지기만 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듯해요. 매사에 철저히 스스로를 단련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모습입니다. 결국 요 녀석은 게을러 터진 것처럼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노력을 거듭하고 있군요.


게으름피우는 중이 아니라 철학을 하고 있는 중이다.....음냐.....




 마지막으로, 무사시는 서른 살 이후로 결투를 한 흔적이 없다고 합니다. 마지막 결투 이후 거의 30년 가까이 지난 후에야 <오륜서>를 집필했고요. 그의 행적은 과장된 측면도 많고, 와전된 부분도 있으며, 심지어 실존 인물인지조차 의심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자가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으며 그 의미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그가 얼마나 강했는지 후세의 우리가 알 도리는 없지만 상당히 강한 사람이었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고요. 더구나 그는 <오륜서>의 서두에 젊은 시절 자신은 병법을 깊이 체험해서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 타고난 강함과 상대의 약함, 하늘의 이치 덕분에 이겼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무사시가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그는 과거 힘과 기술의 단련 및 실전을 통해 거기에 도달하고자 했으나, 그 과정은 곧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토록 잔혹한 길을 걸어오면서 경험한 반성이 무사시 자신으로 하여금 싸움만을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님을 알게 한 것이지요. 한 끗 차이로 목숨을 잃을 수 있었던 당시의 결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름값이 높아진 뒤 자신을 노리는 이들과의 쓸데없는 부딪힘을 피하기 위해 그가 감당했어야 할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그 잔혹한 길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야 비로소 자기 존재 의미와 진정한 강함을 찾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정한 강함을 얻으려면 평화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는 싸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후에야 알게 됩니다. 평화만 아는 것도, 싸움만 아는 것도 유연함이 아니지요. 유연함은 둘 모두를 포용하는 덕목이니까요. 모디는 집사들과 평화롭게 지낼 때와 그렇지 않아야 할 때를 구별할 줄 압니다. 모디와 수없이 투닥거렸지만 지금까지도 잘 지내는 이유는 모디의 이러한 면모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기분을 가감없이 전달하거나 조리있게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집사들 스스로가 상황을 주시하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를 되짚도록 만들기 때문이지요. 즉 모디는 무작정 요구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음으로써 양쪽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얻은 단순함이야말로 걸출한 무인 미야모토 무사시와 뚱뚱한 고양이 모디의 공통점이라 하겠습니다.





 쓰다 보니 바로 앞의 글과 비슷해진 느낌이군요. <오륜서>를 읽고 다른 측면에서 그 이야기를 다시 했다고 여겨 주시면 될 듯합니다. 아무래도 모디에게 배울 점이나 무사시에게서 배울 점이나 결국 세상만사 모든 이치가 같기에 이러한 되풀이가 나타난 것이 아닐까요. 아무튼 모디의 쓸모는 바로 이 유연함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글을 쓰면서 정리하게 되었고, 제 마음도 한결 더 간결해진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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