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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카레 Dec 11. 2023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

가보자고!


 이전에 수많은 실패들을 겪었고 앞으로도 꽤 많이 겪을 예정이지만, 작업의 큰 틀 자체는 어느 정도 잡혔기에 거기에 대한 부담은 거의 사라진 상태입니다. 다만 어떤 방향으로 작업이 나아가야 옳은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아서, 방향성에 관한 걱정은 좀 있답니다. 앞으로 저는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할까요. 이는 누구도 말해 주지 않고 소상히 알려 줄 수도 없는, 결국 오로지 제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만 작업한다고 해서 묘안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작업을 오래 멈추고 생각만 한다고 해서 갑자기 신선하고 명확한 방법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계속 작업을 하면서 정리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들을 현실로 구현해 나가야만 하지요. 그 와중에 피상적인 숙련도나 할 줄 아는 것이 이것뿐이라는 관성은 배제할 줄 알아야 하고요. 그래서 <본업은 화가입니다만>을 끝내기 전에, 다시 최대한 깔끔하게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 보려 합니다.




 그러자면 현 시대 회화의 역할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습니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제 신념과 작업이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야 저도 그 안에서 작업을 변화시킬 테니까요. 제 생각에 회화는, 무섭도록 다분화된 현대미술과 대중 간 가교 역할을 해 주어야 합니다. 물론 회화야말로 가장 오랜 역사를 거쳐 자신만의 입지를 구축한 장르이고, 촘촘히 쌓아 올린 미세한 특성들이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쌓아 올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회화는 존재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 되었고, 화가는 단단하다 못해 천명 수준인 이유를 갖고 있지 않은 이상 회화에 접근조차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지요. 하도 어렵고 복잡한 작품들이 넘쳐나다 보니 요즘에는 회화가 다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대중과 가까워지기에는 어렵기만 합니다.


 저는 최소한 이 부분에서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옹성에 사람들을 기어오르게 만들 수는 없다는 신념을요. 함락 혹은 방어만이 있는 공성전 중도 아닌데, 성문 앞에서 성 안의 모습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성벽을 기어오르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겠습니까. 기를 쓰고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럴 여유와 시간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구태여 그 성에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나게 살 수 있는걸요. 게다가 성을 꽁꽁 닫고만 있으면 아무리 튼튼한 성일지라도 결국 그 안에서 죄다 말라죽을 것이고, 오히려 자멸할 가능성이 높지요. 이미 밖에서 다른 일들을 통해 행복을 충분히 얻은 사람들이 폐쇄적이었던 생태계의 폐허 안으로 들어서 보았자 무슨 감동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서야 우리 좀 구해 달라고, 살려 달라고 빌어도 늦게 될 것입니다.


 작가노트에 대해 고민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나 봅니다. 가장 쉽고 간결하게 제 작업을 드러낼 수 있는 단어들을 찾기 위해서요. 역사가 오래된 만큼 대중과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가장 쉬운 회화이지만, 이미지만으로는 다가가기가 불가능합니다. 좀 전에 말했듯 회화가 거의 지층의 퇴적에 가깝게 조금씩 발전하면서, 이미지도 같은 방식으로 달라졌기에 그 틈으로 파고들라는 말은 그냥 들어오지 말란 말이나 다름없거든요. 저는 이 괴리를 메울 수 있는 방법이 작가가 사용하는 문자 언어, 음성 언어 등으로 이루어진 작가노트라고 여깁니다. 언어가 작품과 얼마나 잘 연결되는지도 중요하지만 제 신념상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 미술을 향유하고자 하지만 진입장벽을 느끼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들에게 제 작업이 편안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길을 가고 싶습니다.


 제 작업이 그런 역할을 하도록 만들고 싶다면 우선 이미지가 어렵더라도, 직관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그 이미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언어를 사용하려면 제 정신 자체가 더 깨끗하게 탁 트여야겠지요. 현재의 미술계 안에서 무엇을 해내고 싶어서 일반적인 과정을 답습하려고만 했던 제 자신을 반성하고, 기왕 문제제기를 한 이상 좀 더 제 신념과 부합하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일이 잘 된다면 미래의 어느 때쯤 여러분께서는, 지금 이 글을 읽으실 때보다 제 작업에 대해 더 명확하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때조차도 저 혼자 수렁에 빠져 골골대고 있거나요. 후자의 상황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렇다면 제 그림이 어떤 이미지를 갖도록 해야 하는지 가닥을 잡아 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형상을 취하면 필연적으로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발생하는데, 감상자는 그 이야기의 흐름을 좇으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편 형상이 없는 그림은 그 자체로 다가와서 다른 방향의 생각을 이끌어내게 되지요. 제 작업은 현재 분명히 어떤 형상을 갖고 있는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만, 가까이에서 보면 다 뭉그러져 있어서 덩어리들의 향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직은 이미지 안에서 형상이 더 강한 입장이나, 형상이 사라질 가능성 또한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도록 되어 있답니다. 아무래도 이미지에 대한 제 고민은 직관적인 아름다움과 언어와의 연결점을 확고히 하는 데에 형상이 필요한지 혹은 필요하지 않은지로 이어질 듯합니다. 또한 쉽고 간결한 언어를 선택하고자 한다면, 이미지는 반대로 지금보다 좀 더 복잡하고 포괄적인 영역을 드러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주의해야 할 점은, 언어가 지나치게 강해져서 이미지가 거기에 잡아먹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기에 위치를 명확히 해야 하지요. 일단 이미지가 포괄하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형상을 특정할 수가 없게 될 터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점차 형상은 사라지겠고요. 그런데 작품에 필요한 언어와 박자가 맞지 않으면, 형상이 없다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되었지만 아수라장일 뿐인 이미지의 행태를 언어가 변명하는 형국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지가 뒤에서 헤헹 신난다 하면서 제 원하는 대로 놀고 있는 동안 언어가 사람들 앞에 자주 나서면서 더 강해지겠지요. 그러느니 이미지는 차라리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있는 편이 나아질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추상회화를 보며 느껴지는 거부감을 생각해 봅시다. 색칠한 캔버스에 불과한 내 앞의 그림은 수많은 고전 학문 관련 지식과 은유, 감정, 시대상에 대한 고찰을 요구하며 떵떵거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혹은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누군가가 쓴 글에서 나온 내용일 뿐입니다. 화가를 포함한 모든 미술 관련 종사자들은 작품이 그런 허황된 권위를 갖도록 만들려는 사람이어서는 안 되지요. 하지만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기 어려운 언어적 권위가 다양한 예술 형식에 대중이 접근하려는 시도들을 막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위대한 화가들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저처럼 보잘것없는 무명의 화가라도, 제 작품이 가진 언어와 이미지가 상통하지 못하거나 언어가 이미지를 넘어서는 권력을 갖게 된다면 자그마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잘못이 자칫하면 저를 그림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수 있고요.


 결국 회화가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면 언어와 이미지는 함께 갈 수밖에 없을 터, 제 신념과 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언어가 확고해지고 이미지가 모호해지는 길을 택해야겠습니다. 이미 이전에 추상을 건드려 본 경험도 있으니 실패를 거울삼을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때는 구구절절 작업 방식에 대한 설명이 잔뜩 필요했지만 앞으로는 아니기를 바랍니다. 형상이 사라질수록 그림을 그리기는 점점 부담스러워지겠으나 차차 그 부담을 자유로움으로 바꿔 나가면서 회화를 대할 수 있기를 원하고요.




 마지막으로 정리해 볼 점은 제가 제시한 화두들을 어떻게 계속 이끌고 갈 것인지입니다. 물감이 천 위에 달라붙어 있는 모양새와 만물이 시공간에 존재하는 방식이 비슷하다는 확신은 생겼습니다만, 정말 그것만이 제가 말하고 싶은 바라면 물감을 열심히 칠하고 뭉개는 일을 반복하면 그만이겠지요. 이미지를 여러 방식으로 변형하면서 계속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미술의 방법이기는 한데, 그렇다 하여도 무언가 그 안에서 발전하는 부분이 있어야 관성에 빠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맨눈이라는 개념이 잘 확립되어야 하겠습니다. 맨눈은 있는 그대로, 눈앞의 모든 것을 제거하고 세상이 보여주는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눈이라고 말씀드렸지요. 비록 그 단서는 안경이나 콘택트렌즈 없이 바라본 눈앞의 물리적인 풍경에서 나왔지만, 맨눈의 개념은 결국 정신적인 측면에 속해 있습니다. 제가 신화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는, 신화란 세상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시도들의 집대성이기 때문이지요. 가만히 보면, 엄청난 세월이 흐른 후에는 우리도 신화의 영역에 편입될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후세의 존재들은 우리, 그들 입장에서는 과거의 시대에 살았던 존재들이 어떻게 세상을 받아들였는지를 생각하고 우리가 쌓은 유산 위에서 살아가겠지요. 그 후세의 존재들도 더 후세의 존재들에게는 또다른 신화가 될 것이고요. 즉 신화는 특정될 수 있는 시간대의 것이 아니며, 매순간은 일상이자 신화가 됩니다. 모든 시간은 언젠가 신화로 탈바꿈한다는 것입니다. 즉 맨눈은 신화, 혹은 시간을 보는 눈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어요.


 시간 자체를 보는 눈에 다가간다면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거대한 시간도 있고, 작은 시간도 있지요. 만약 거대한 시간을 볼 수 있도록 우주 단위로 맨눈의 시야가 확장된다고 할지라도 각각의 존재는 여전히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쯤이 되면 하나하나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어렵게 되지요. 또한 각각의 존재에 관한 개별적인 이야기와 은유를 위해서는 형상이 필요하겠지만,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내용을 다루자면 형상은 불필요해집니다. 형상이 나타나면 어떤 연유로든 개별 존재에 초점이 모이게 마련이고, 형상이 사라지면 초점을 맞출 부분을 찾지 못하니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 보다 넓고 크게 볼 수 있으니까요. 이 두 시야를 양 끝에 놓고 그 사이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의 범위를 잘 정하는 데에 제 작업이 나아갈 길이 있겠군요. 저는 과연 각각의 삶을 형성한 시간들을 그리고 싶은 것일까요, 아니면 전체에 해당하는 시간을 그리고 싶은 것일까요. 전자는 훨씬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지만 이야기의 범위가 협소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후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한 이미지 안에 녹여낼 수는 있겠지만 잘못했다가는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버릴 터이고, 무엇보다도 금세 재미가 식어 버릴 위험이 있지요. 양쪽 다 일장일단이 있으나 각자 의미는 있습니다. 조만간 제가 이 갈림길에서 내려야만 하는 선택에 남은 인생이 좌우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이거 정말 부담스럽기 짝이 없군요.




 그래서 요 며칠 간은 작업을 쉬고 어떤 선택을 할지 고심하는 중이랍니다. 이전에는 말만 그랬지 이틀 이상 쉬어 본 적이 없습니다만, 지금은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참이라 벌써 1주일 가량을 쉬었고, 길지는 않겠지만 당분간은 더 쉬어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1년 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한 번에 터져서인지, 독감까지 겹쳐 작업을 할 엄두를 못 내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전에는 작업을 쉬고 있으면 불안하고 심심해서 견딜 수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편합니다. 아마 제가 글들을 쓰면서 나름대로 머리를 식혔기도 하고, 이 휴식이 작업을 아예 놓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임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에요. 더 제대로 된 작업을 하기 위해서 잠시 기다리는 상태일 뿐이지요. 만약 휴식이 헛되지 않는다면, 드디어 한 사람의 화가로서 자부심을 갖고 그림을 그려 나갈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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