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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카레 Nov 27. 2023

작가노트 쓰기

뭐 이렇게 필요한 것이 많아


오늘은 작가노트, 혹은 작업노트 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작가노트란 자기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서 포트폴리오 혹은 도록 등의 앞에 써 놓는 몇 줄 글을 일컫지요. 현대미술이 알아듣고 감상하기 힘들다는 것은 다들 익히 아실 터입니다. 작품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던 먼 옛날과는 달리 이제는 대부분의 작품에 설명이 꼭 필요하게 되었지요. 참으로 모순이라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예술은 말로 표현될 수 없다고 하면서 말로 표현해야 읽고 작품도 보아 주겠다니, 이거 아주 웃긴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간화선의 화두를 이용한 수행을 비유로 들 수 있겠군요. 비상식적인 질문과 답변, 즉 선문답을 통해 견성을 요구하는 이 행위에서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공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맥락이 불분명한 언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바 혹은 현재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바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언어가 필수적이지요. 하지만 화두는 설명되지 않는 심오한 것을 구태여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간단히 제시함으로써 그 필요조건을 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노트 또한 일종의 화두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예술가에 따라 질은 천지차이지만 자기가 알아낸 부분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부분이 얼마나 복잡하든지 반드시 언어를 통해서 정리를 해 주어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어느 하나 같은 것 없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기만의 작업을 통해 예술관을 펼쳐 나가고 있는 것을 보면,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무엇이 분명히 있는 것은 확실하답니다. 더구나 언어가 작품을 지배해 버린다면 시각 예술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사라지게 되기도 해요. 결국 작가노트는 관객이 본질적인 의미에 다가서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만 하는군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무엇이야말로 결국 예술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부분이니까요.


 하지만 선문답을 진행하는 분들이 과연 아무 맥락도 없이, 아무 뜻도 없이 말만 뱉어냈는가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선문답 역시 분명히 방향성을 갖고 있는 대화이기에, 고도의 경지에 이른 분들만이 판단할 수 있는 특유의 느낌이 있다고 하네요. 게다가 화두에 대한 문답 몇 개만 가지고도 상대가 진정 깨달았는지 아닌지까지 알아차릴 수 있다니 신기하지요. 즉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은 전부 갖추되, 언어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더 깊은 세계로 이끌어 주는 것이 작가노트의 또 다른 역할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이 잘 수행되기 위해서는 예술가가 작가노트를 부가물로 이용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자기 작업과 잘 융화될 수 있도록 굉장한 수련을 거치고 써야만 하겠더군요.




 어떻게 쓸 것인가를 수없이 고민했습니다만, 애초에 작업만큼이나 정답이 없기에 난감했지요. 게다가 작업 방식이 하도 많이 바뀐 나머지 그때마다 새로운 작가노트를 연구해서 써야 했고요. 작가노트의 기본 구조는 왜 이 작업을 했는지, 어떤 재료로 표현을 했고 왜 그랬는지, 알아 가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로 이루어져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조형언어를 문자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제가 보는 제 그림과 남들이 보는 제 그림이 결코 같을 수 없으니까요. 남들은 모두 저와는 다른 각자의 생각을 갖고 있고, 제 관점이 새롭거나 어지간히 확고한 의미가 있지 않고서야 그 사이는 잘 좁아지지 않거든요. 그래서 기본 구조에 맞게 쓰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 마음대로 쓰고는 한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작가노트가 기본 구조에 맞게 정형화될수록 제 글이 나빠진다는 점이었습니다. 논리에 맞는 글쓰기를 오래 하고 가르쳐 온 저와는 달리 예술은 논리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미술계 안에서 통용되는 글들에는 ‘점프 뛴다’고 통칭하는, 비논리적이고 단계가 불명확한 비약이 있고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어야 인정을 받는 듯하더군요. 위에서도 말했듯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언어로 표현해야 하기에 그런 ’점프‘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정석적인 글쓰기를 배운 만큼 기본기를 무엇보다도 중시하지요. 특히나 에세이는 논리를 잘 구조화시키고 큰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독자에게 계속 상기시키는 글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작가노트 역시 일종의 에세이와 다름없고요. 그래서인지 제가 다른 사람들의 작가노트를 읽으면 그 무질서한 비약에 미칠 지경이 되어 버립니다. 논리가 아예 없는 경우는 다반사요, 미술계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들을 나열식으로 써서 문장을 채운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에요.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 주려 해도, 글이라는 범주 안에 넣을 수 있을는지조차 의문이 드는 작가노트들이 왕왕 있지요.


 그러나 어떻게든 작가노트란 것을 써서 자기 작업과 연관시키는 그들과 달리, 저는 작가노트에만 1년 이상을 허비할 정도로 정체되어 있었답니다. 글 자체에 너무 집중하고 한 번에 이해가 되도록 간결한 문장들만 뽑아내려다 보니, 글이 그림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거나 서로 제대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몽땅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썼으니까요. 그에 반해 다른 사람들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언가라도 썼고, 누군가는 그것을 읽었고, 작품과 연결점을 찾아 의미들을 발굴해 냈지요. 저는 보다 더 괜찮은 것을 만들어 내겠다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재우치고 합리화했던 모양입니다. 즉 제가 하고 있었던 일은 그림을 어떻게든 ’완벽하게 설명해 내려는’ 일,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글과 그림은 꼭 맞물리는 관계가 아니라 어느 정도 느슨하게, 유연하게 서로를 보완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서인 듯해요. 그러다 보니 화두가 되어 주어야 할 작가노트가 오히려 그림을 지배해 버리게 된 것이랍니다. 제 입으로 회화는 ‘설명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해 놓고 정작 그것을 실천하지는 않았지요. 아무튼 이대로는 평생 작가노트 하나 쓰지 못하고 죽을 판이었고, 저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 방법이란, 어차피 미술하는 사람들이 글을 잘 알지 못한다면 저도 제 비전문 분야를 건드려 보자는 것이었지요. 제가 특화되어 있는 분야는 아무래도 비문학이니, 문학을 활용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분야가 아니라고 해서 완전히 난장판인 글을 써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최소한 기본은 해낼 수 있는 장르, 그나마 제가 잘 접근할 수 있는 장르를 선택해야 했지요. 저는 동거인이 제 옆에서 그토록 작가노트에 적용해 보라고 노래를 불렀으나 제가 자신이 없어서 시도하지 못했던 방식, 바로 시를 선택하기로 했답니다. 또 동거인 말을 흘려 듣다가 이 고생입니다.




 역사적으로 화가들은 시를 꽤 자주 써 왔습니다. 당연히 전문 시인들만큼은 못하겠지만, 그들도 아마 자기 작업을 말하기 위해 정형화된 글을 이용하기가 상당히 힘들었기 때문에 최후의 방법으로 시를 선택했을 것이라 생각해요. 아무래도 운문은 산문보다 함축적이니 유연함과 느슨함을 찾기에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고, 실제로 이전의 화가들도 그런 판단으로 시를 쓴 것이 아닐까요. 시의 작법 자체는 공부했지만 어차피 그림을 그릴 요량이어서 묵혀 두었는데, 이참에 이전에 담아 놓았던 이론적 지식들이라도 좀 써먹어야 하겠군요.


 대체 무슨 내용이 들어가야 할까요. 일단 제가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 담겨야겠지요. 정확히는 어떤 모습을 세상이 제게 보여주려고 했는지, 제가 이전에는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어렴풋이 알게 된 이치가 묘사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광경을 물리적으로 볼 수는 없지요. 이전 글에서 말씀드렸듯 세상은 시각 외에도 수많은 방법을 하나로 뭉쳐 우리에게 자신의 진정한 면모를 드러내니까요. 저는 그 이치를 조금 엿보게 된 계기만을, 단서를 찾게 된 경험만을 제시하고 정신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만을 말해 주면 될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아침 우연히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제 눈에 들어온 세상이 그림처럼 보였던 일을 말입니다. 물감이 거칠게 칠해진 그림이 제 앞에 나타나자 이전까지의 고민들이,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아서가 아니라 앞에 항상 무언가를 놓은 채로 보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작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말이지요. 그 부분을 우선 시의 앞에 놓음으로써 제가 평생의 주제로 삼으려는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제가 그리려는 소재들을 포함시키면 될 것 같군요. ‘앰비규어스 미솔로지컬 펑크’를 기억하시지요. 앰비규어스의 특성을 위해 작업에 사용한 소재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게 하고 싶지도, 가려 사용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미솔로지컬하게, 신화적 주제와 상황 그리고 은유가 잘 녹아들기만 한다면 자연물이건 인공물이건 사람이건 동물이건 딱히 상관이 없을 것 같거든요. 여지를 남겨두고 모호하게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이고, 어차피 무엇을 그려도 물감의 질감에 다 묻힐 것이니 이 부분은 제가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대로 쓰겠습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 자체를 써야 하겠습니다. 맨눈으로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을요.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 뒤에는 언제나 누군가 먼저 그려 놓은 그림이 있고, 거기에는 이미 여기에 왔다 간 사람들의 시간들이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우리도 물감이 되어 그 위에 얹혀 굳어지고, 언젠가는 또 다른 시간들이 다시 우리 위를 덮겠지요. 모든 존재들 간에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그러한 상호작용이 있고 내적 힘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물리적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모습, 정신적으로만 볼 수 있는 모습이 따로 있다는 말을 최대한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의 배치를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다만 저 역시도 그런 세상을 실제로는 볼 수 없는 일개 사람에 불과하니, 서로 얽히고설킨 힘들과 상호작용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당연히 모릅니다. 제가 마치 이치를 정확히 깨달은 것처럼, 감히 그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처럼 시가 쓰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를 계몽하는 것, 어떤 명제를 확고하게 전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순간 예술은 그 힘을 잃는다고 하지요. 내적 힘들이 우리 가운데에 항상 있어 왔다는 깨달음은 저만의 것도 아니며, 어찌 보면 세상의 이치를 알아 가는 과정의 가장 작은 출발점입니다. 작가노트가 마치 누군가에게 저의 완결된 사상을 전달하는 도구처럼 변질되어서는 안 될 터인데 말이에요.


 그렇다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달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정말 어렵군요. 무의미와 과한 의미 사이에 있는 단어들을 잘 건져 올려야 할 터인데, 이럴 때에는  너무 세부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실마리를 잡아내는 편이 더 낫지요. 위에 써 놓은 방식대로 전체의 틀을 잡고 그에 맞게 조금씩 깎아 나가면서, 어디에든지 작업들과 함께 적어 넣을 수 있는 시를 쓰는 일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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