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카레 Nov 20. 2023

고양이와 그림

둘 다 좋은데


 제 이전 브런치북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고양이와 함께 삽니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고 제게 언제나 무한한 행복만을 안겨 주는 존재이지요.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준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래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은 제가 고양이를 그릴 때마다 진심이 느껴진다고, 정말로 사랑이 샘솟는다고 말해 주고는 했답니다. 고양이를 소재로 그림을 계속 그려 보라고 하는 이들도 많았지요. 사실 저도 고양이를 그리는 일이 가장 마음 편하고 쉽기는 하답니다. 어떻게 그리든지 어느 정도 이상의 결과물은 나오기에 작업할 때 그다지 고민할 필요가 없거든요.  매일 보고 쓰다듬고 함께 잠드는지라 털냄새, 발바닥 냄새는 물론이고 때로는 눈썹 가닥 수까지 기억할 정도인데 당연히 그럴밖에요. 보통 자신에게 친근한 것들로부터 작업을 시작하기 마련이니, 제가 고양이를 그린다 해도 딱히 이상할 일은 아니지요.


 그런데도 저는 고양이를 주 소재로 삼아 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가끔 작업 어딘가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이지요. 몇 번 저희 집 고양이를 그려 본 일은 있었습니다만 그때마다 결국 연속해서 작업들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답니다.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고, 혹시 고양이보다는 더 크고 웅장한 소재를 그리고 싶다는 욕망 혹은 비뚤어진 예술병 때문이었는가 하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고양이가 제 우주이고 전부인데 고양이보다 큰 소재가 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실 신이나 천사가 제게는 고양이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아닐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으로서, 차라리 다른 소재들이 더 작았으면 작았지요.

 



 첫째 이유는, 아마 고양이가 너무도 익숙해서일 것입니다.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를 넘어서 ‘아는 대로’ 고양이를 그려 버리기가 쉽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성격상의 문제이기는 합니다. 고양이들은 하나하나의 개체가 전부 매력이 있지만 그 아름다움을 일일이 그리기 위해서는 모든 녀석들을 다 저희 집 고양이만큼 오래 보아야만 해요. 그런데 고양이의 자유롭고 경계심 많은 본성상 결코 그럴 수 없고요. 그러니 결국 고양이를 소재로 삼는다면, 관찰보다는 그냥 고양이 하나를 선택해서 사진을 찍은 뒤 그에 맞게 그리는 방법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될 것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제가 아는 고양이의 모습을 가지고 거기에 다른 면모들을 채워 넣어야 하는데, 제 입장에서 그런 행위는 쓸데없는 거짓말이나 다름없습니다.


 또한 익숙한 것을 손 가는 대로 그리는 일은 제게 참을 수 없이 힘든 일이고, 고양이를 그렇게 그리다가는 언젠가 반드시 질릴 날이 올 것입니다. 저는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진행하는 방식에 치를 떠는 사람이거든요. 우선 저희 집 고양이만 계속 그리다 보면 아예 형태와 색을 외워 버릴지도 모르고, 그러면 언젠가는 무의식적으로 같은 색, 같은 형태, 같은 표현을 사용하게 되겠지요. 만약 다른 고양이를 그리더라도, 사람도 그렇듯 고양이 종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특성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진부하게 반복되는 무언가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렇게 아는 대로 그리다가 끝에 가서는 죄다 비슷하게 생긴 고양이들만 양산하는 꼴을 맞이할 위험도 있고요. 그것은 말 그대로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에요.




 둘째 이유는, 그 익숙한 아름다움 말고는 고양이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무엇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오로지 고양이 그 자체를 좋아할 뿐, 파생될 수 있는 주제나 회화적 접근법 등과의 관련성에 조금도 눈길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루이스 웨인(1860~1939)이나 변상벽(?~1775)은 자기만의 방법으로 고양이를 변형하거나, 색다른 표정과 동작을 넣어 유일무이한 소재로 승격시킨 화가들입니다. 그들 역시도 고양이를 수없이 관찰했고 사랑했을 것이란 사실은 확실하지요. 한편으로 그들은 고양이 특유의 습성이나 사람과의 연관성을 재미나게 그리는 데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모양입니다. 고양이가 가진 매력 넘치는 면모들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지, 회화의 개념 안에 직접적으로 고양이를 연결해서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물감이 주가 되고 꼭 되어야만 하는 제 작업의 방식 안에서는 고양이의 매력이 온전히 드러나기 힘듭니다. 두껍게 쌓여서 뒤엉킨 채 굳어 버린 물감들은 보송보송함 및 말랑말랑함과 완전히 반대에 놓여 있고, 완성된 결과물에서는 따뜻한 털냄새 대신 비릿하고 싸한 화학 성분 냄새가 풍기지요. 그렇다고 반대로 그 매력을 더 강조하자니 물감을 사용할 필요가 사라지는 상황을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저는 ‘회화적 고양이’에는 인연이 없는 것 같군요. 고양이가 회화적 수단이 될 수 있기야 하겠지만 그다지 시도해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감을 사용했을 때 제가 보고 느끼는 것들이 드러나기 어려워진다면 저는 미련 없이 고양이 그리기를 포기할 것이에요. 회화를 하겠다는 이가 딱히 다른 재료를 사용할 의도가 전무한 상태에서, 유일한 표현 수단인 물감을 포기해서는 안 되니까요.


 또한 털을 매일 쓰다듬고 뱃살을 꾹꾹 찔러 보고 앞발을 입에 넣어 보는 저는,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있는 만큼, 아무리 똑같이 드러내려고 해도 절대 거기에 미치지 못하겠지요. 그림은 그림일 뿐이니까요. 만일 제가 대상을 똑같이 그려내는 행위가 의미 있는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또 모르지만, 현 시대에 그러한 능력은 있으나마나하기도 하고요. 고양이의 매력을 전부 표현하겠답시고 고양이를 진짜 고양이처럼 그리느니 차라리 사진작가가 되고 말겠습니다. 최소한 사진은 수염 한 가닥까지도 이미지 안에 정확하게 담아낼 수 있으니까요. 아니면 회화는 때려 치우고 다른 일을 하면서, 여가 시간 내내 집에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겠어요.



 

 셋째 이유는, 고양이가 제 곁을 떠난 다음에는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을지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직업은 평생 이어갈 수 있는 의욕과 함께하는 일이니까요. 만약 고양이가 더 이상 제 곁에 없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의욕이 사라질 터이고 그 뒤에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은 고양이도 결코 원하지 않겠지요. 다른 이유로 그림을 그만둔다면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제 전부나 다름없는 고양이를 잃고 나서 그림과 연을 끊는다면 동시에 두 개의 기둥이 무너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삶을 지탱하는 큰 줄기들이 그런 식으로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은 여러모로 좋지 못하겠지요.




 고양이를 그려 볼까 하는 유혹은 늘 있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를 그리게 되면 진정으로 제가 원하는 바와 너무나도 멀어져 영영 거리를 좁힐 수 없다는 예감 역시도 늘 있지요. 언젠가 이 시절의 저를 돌이켜보면서, 이상한 아집에 찌들어 있었다고 자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당장은 제가 맞다고 여기는 길을 가 보는 쪽이 마음 편하고, 아마 그쪽이 결과적으로도 옳을 것이라 믿고 있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에는 고양이에 쏟는 진심과는 다른 종류의 진심을 쏟고 있다고 여기기도 하고요.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작업은 작업대로 양쪽을 잘 챙기면서 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전 15화 대관절 무엇이 좋은고 -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