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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세상 Feb 10. 2024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가장 소중한 빛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빛이다.

넷플릭스에서 얼마 전에 4부작 영화를 보았다.

퓰리처 상을 받은 앤서니 도어Anthony Doer의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이다. 2차 대전 나치의 점령 아래 있던 프랑스 생 말로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겪는 윤리적 갈등, 휴매니티에 대한 질문,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의 접속(connection)에 대한 이야기이다

원래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작가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10년 동안 소설의 무대가 된 2차 대전과 생 말로 지역 독일군의 점령 실태에 대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소설은 대출 신청 후 긴 대기자 명단에 올려져 있어 아직 읽지 못했다. 노래 가사처럼 단순하며 아름다운 문장으로 극찬을 받았다고 해서 기대감이 크다. 영화는 원작에 비해 평가가 썩 좋지는 않다. 아마도 인물들의 내적 갈등의 깊이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상당히 감명 깊게 보았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고 등장인물의 성격, 대화, 음악은 아름답다. 드뷔시의 ‘달빛’이 낮게 배경으로 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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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944년 8월 생 말로 지역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 장면으로 시작된다. 연합군은 폭격과 함께 앞으로 계속 있을 공중폭격에 대비해 주민들에게 피신할 것을 권하는 전단을 뿌린다. 그러나 독일군은 도시 밖으로 통하는 길을 모두 봉쇄하고 옥쇄작전을 펼친다. 시민들은 굶주림과 폭격의 공포 속에서 살아남으려 애쓴다.


폭격으로 흔들리고 부서진 건물의 옥탑방에서 한 소녀가 개인 방송을 하고 있다.

마리 로르 르블랑. 그 소녀는 시각 장애인이다.

매일 어둠 속에서 사는 마리는 이 영화의 핵심적인 인물 중의 하나다. 비록 앞이 보이지 않지만 대단히 독립적이고 용감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인물이다.

에티엔 아저씨의 다락방에서 라디오 통신기를 발견한 마리는 어렸을 적 자신의 어두운 세계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준 교수의 단파방송 주파수에 맞추어 다시 방송을 시작한다. 레지스탕스들이 모은 정보를 코드로 만들어 자신이 하는 방송에 실어 연합군에게 보낸다. 아버지가 떠난 후 소식이 끊기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마넥 아줌마가 죽고, 한 시간 후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에티엔 아저씨까지 소식이 끊긴 집에 홀로 남아 굶주림과 두려움과 폭격의 위험을 무릅쓰며 방송을 계속한다.

마리는 아버지가 자신의 목소리를 어디에선가 듣고 있다고 믿고 아버지에게 인사를 전하고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호소한다.

    

     아빠, 당신의 목소리를 내가 듣는 한 당신은 떠나지 않았어요.

     아빠가 내 목소리를 듣는 한 나는 떠난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떠나지 않는 한 아빠도 떠난 것이 아니에요.


그녀의 방송에 귀 기울이고 있는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는 젊은 청년이 있다. 베르너 패니그. 그는 고아 출신의 독일군 통신병이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이다.

베르너는 전쟁에 의해 파괴되는 인간성과 윤리적 갈등으로 고뇌하는 인물이다.

그는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의 지하에서 단파 라디오를 듣고 있다. 그가 듣고 있는 것은 바로 마리가 송출하고 있는 방송이다. 방송에서 마리는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의 한 부분을 읽어 준다. (해저 이만리는 번역의 오류이다. 원래 제목은 <해저 2만 리그leagues>이고 이를 환산하면 20만 리쯤 된다고 한다.)

     

     우리는 심해의 아주 윗부분 조금밖에 알지 못합니다. 바다에 사는 수천수만 가지의 생물들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바다의 위쪽에 사는 생물들입니다. 아직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물들이 가장 깊고 가장 어두운 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다 깊숙이 숨겨져 있는 미지의 생명체는 전쟁이라는 참혹한 한계상황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우리 내면에 깊숙이 숨겨져 있던 본성일 수도 있다. 전쟁은 폰 럼펠처럼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전설의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기 위해 누구든 고문하고 죽일 수 있는 이기적 욕망과 사악함을 드러낸다. 반면 많은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의 용기와 도덕성을 발견하게 하기도 한다.


마리와 베르너는 서로 알지는 못했지만 이 단파 방송을 통해 아주 어렸을 적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단파 13.10 Hz는 자칭 프로페서The professor라는 사람이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프랑스어 방송이었다. 십 대가 되기 전 두 아이는 잠자리에서 교수의 방송을 듣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수학과 전기, 기계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베르너는 우연히 발견한 고물 라디오를 고쳐 처음으로 고아원 밖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접한다. 교수의 얘기는 베르너의 표현에 의하면 ‘세상은 너무나 환상적이고, 그 세상에 대한 모든 지식을 알려주는 교수의 방송 또한 너무나 환상적인 것’이다.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베르너는 외국 방송을 전면 금지한 나치의 법을 어기고 자신의 세계 밖의 모든 세상을 알게 해주는 이 방송을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듣는다. 고아인 그에게 교수는 바깥세상과 자신을 연결해 주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호기심이 많고 과학적 탐구심이 강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마리에게도 교수의 방송은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주고 그 세계와 접속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어느 날 어린 마리와 베르너가 파리와 독일의 변두리 탄광 마을에서 각자 듣고 있는 교수의 방송은 ‘빛’에 대한 것이다.


    우주에는 수십 개 조의 빛의 입자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찬란하게 반짝이는 빛의 입자가 (눈을 통해) 뇌에 닿습니다. 우리의 뇌는 사실은 한줄기 빛도 닿지 않는 완벽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1kg 남짓한 회색의 축축한 덩어리입니다. 그렇게 완전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뇌가 어떻게 그처럼 다양하고 찬란한 색깔을 가진 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까요? … 어둠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은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조차 우리의 마음속에는 빛이 있습니다.


마리의 아버지 다니엘 르블랑은 파리 자연사 박물관의 열쇠관리자로 일한다. 그는  딸의 독립적 삶을 위해 집 주변 동네의 모형거리를 만들어 손으로 건물과 거리의 건널목, 모퉁이를 만지며 익히게 한다. 그는 마리가 신체적 불편함을 이기고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다닐 수 있기를 바란다.

1940년 독일군이 파리에 점령군으로 들어올 때 16살 마리는 아빠와 함께 파리를 탈출해 생 말로에 있는 에티엔 아저씨의 집으로 피신한다. 아저씨의 집에서도 다니엘은 마리를 위해 생 말로의 도시 모형을 제작한다.


다니엘은 박물관에 맡겨진 전설적인 다이아몬드 <불꽃의 바다Sea of Flames>를 독일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몰래 빼내 마리도 모르는 곳에 감춘다. 이 보석을 가진 자는 큰 행운을 얻지만 그가 사랑한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모순적 저주를 갖고 있다.

예술품 감정사이며 독일 나치의 에스에스SS 장교인 폰 럼펠이 자신의 육체를 갉아먹는 암을 이기기 위해 이 보석을 찾으려는 집념으로 다니엘과 마리를 추적하는 것이 영화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얼개이다.

다니엘은 독일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마리를 에티엔 아저씨 집에 남겨놓고 혼자 파리로 돌아간 후 실종된다.

떠나기 전 다니엘은 딸에게 어디에 있든 딸의 방송을 듣겠다고 약속한다.

그는 어린 마리에게 늘 "세상의 모든 것은 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귀 기울여 듣기만 하면 된다"고 교육하였다. 세상의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는 마리는 그 덕에 주변의 사람들의 일상을 꿰고 있고 그들의 기분과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마리는 단지 주변 사람들의 돌봄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돌보는 존재이기도 하다. 럼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집에 침입한 그에게 대적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능력 덕분이다.


피점령지역에서 전쟁의 참혹함과 싸우는 마리가 있다면 반대편인 나치군에서 전쟁의 비인간성에 고통받는 소년 베르너 페니그가 있다. 베르너는 누나인 쥬타와 함께 고아원에서 살았다. 그의 재능에 대한 소문을 들은 독일군은 베르너를 나치의 특수훈련학교에 입학시켜 통신전문병으로 키워낸다. 탄광의 광부로 사는 삶 대신 과학자가 되기 위해 학교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베르너는 혹독한 훈련과 학대를 견디어 낸다. 그러나 독일군은 16살 밖에 안 된 베르너의 나이를 무시하고 전투가 치열한 동부전선 최전방에 투입한다. 그는 점령지의 불법적 전파방송자의 위치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고 레지스탕스들을 토벌하는데 기여한다. 베르너의 연약하고 감수성 많은 성격이 나치 군대에 의해 철저히 망가질 것을 염려한 누이 쥬타는 특수훈련학교로 떠나는 베르너에게 ‘이 전쟁이 절대 너를 파괴하지 않게 하라’고 당부한다. 베르너의 윤리적 갈등의 깊이는 아쉽게도 영화에서는 들여다보기 어렵다. 아마도 원작에서는 가장 많은 비중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을까… 베르너는 혹독한 훈련학교의 생활을 견디고 전방에 배치된 뒤에도 기회만 있으면 13.10Hz 단파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고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베르너가 잃어가고 있는 순수성, 희망에 대한 간절한 매달림 일 것 같다. 그런데 생 말로에 도착한 이후 드디어 애타게 기다리고 찾던 그 방송에 접속하게 된다. 다만 이번에는 교수의 목소리 대신 비슷한 또래의 소녀가 읽어주는 <해저 2만 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방송을 보호하고 비밀에 부치기 위한 베르너의 행동은 절망적이고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켜줄 하나의 빛을 꺼트리지 않으려는 치열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비밀이 발각되고 불법 송출자의 위치를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어쩔 수 없이 마리를 위험에 빠트리게 된 베르너에게 자신의 빛을 지킬지 꺼트릴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베르너의 마지막 결단은 그의 고뇌와 망설임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힘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주변의 환경에 의해 이미 결정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우리는 과연 가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영화에서 그 힘을 두 가지 방향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고립되고 고통받고 있지만 자신의 내면에 있는 빛을 꺼트리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캄캄한 어둠 속일지라도 마음속의 빛은 우리를 살게 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마리와 베르너는 교수가 말한 마음속의 빛, ‘볼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빛’에 의지해 매일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자신의 인간다움을 지켜 나간다. 마리와 베르너뿐만 아니다. 1차 세계대전 참전 후 전쟁 후 외상 증세로 세상에 나가지 못하고 다락방에 스스로를 가둔 에티엔 아저씨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생명을 걸고 레지스탕스 일을 하는 마넥 아줌마도, 마리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아버지 다니엘이나 레스토랑의 한 이름 없는 바텐더도 모두 빛을 꺼트리지 않으려는 또 다른 전쟁-내면의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다.


다른 하나는 고립되어 있는, 그러나 ‘살아 있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접속connection’이다. 독일과 파리에 사는 소년과 소녀가 라디오 전파를 통해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연결되어 있다. 교수는 자신의 방송 다른 쪽 끝에 누가 있는지 조차 모르지만 그들을 향해 자신의 마음속 빛을 내보낸다.

이들은 생 말로에 대한 연합군의 마지막 폭격이 진행되고 독일군의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는 지옥의 현장에서 드디어 잠깐 만나게 된다. 그 잠깐의 만남이 서로에게 구원이 된다. (영화는 원작의 독자들의 성원에 답하기 위해 이 만남을 좀 더 희망적인 것으로 각색했다고 한다).


전통적 방식의 연대-눈에 보이고 실체를 확인하기 쉬운 직접적이고 조직적인, 시간과 공간이 규정된 연대가 아니라 전파를 통한 연결, 각자 자신의 형편에 따라 강도나 형태가 자유로운 새로운 방식의 연대, 시간과 공간의 일치성이 극복된, 지극히 개인적이라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각자의 내면에 더 깊게 파고드는 이 접속이 어쩌면 현대 사회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연대의 기초가 아닐까. 2차 대전 당시의 라디오 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효과적인 통신수단, 공간과 시간을 간단히 뛰어넘을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설 연휴이다.

설이라는 단어가 주던 설레임과 따뜻함이 기억 속에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새해에 걸었던 막연하지만 충만했던 기대와 희망.


전쟁의 위협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조국의 현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이 소중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지만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의 마지막 남은 피난처인 라파지역에 대한 공습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 백만명의 피난민들은 더 이상 피난할 곳이 없다.

비극을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진 권력자들은 이를 막을 의지나 능력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참혹한 전쟁에 무기를 공급하며 이익을 얻는 사람들, 나라들도 있다. (어디라고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설날, 나는 기대와 희망, 용기를 갖고 싶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우리가 성취한 가치를 보존하고 삶을 지속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캄캄한 어둠 속을 뚫고 나갈 빛이 필요하다. 마리와 베르너는 "아무런 빛도 볼 수 없는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우리는 빛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빛이  가장 소중한 빛"이라고도 말한다. 그 빛은 우리 안에 있다. 비록 우리는 서로의 빛을 볼 수 없지만 각자가 자신의 빛을 지켜내고 누군가에게 가 닿기를 바란다면 언젠가 그리고 언제나 변화를 가져올 ‘만남’이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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