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함을 바라다
잠에 들 수가 없다. 쓰라리게 찌르던 기억이 진득하고 불쾌한 점액질이 되어 머릿속을 뒤덮어버리는 느낌. 절망은 그렇게 천천히 한 인간을 잡아먹는 것이다. 어두운 거실에 우울하고 누런 전등이 켜져 있다. 고요하며 외로운 새벽의 시간에 스스로를 가둔 지 며칠이 지났는지. 무뎌진 감각을 쌀쌀한 공기가 고르게 몸뚱아리를 품는다. 다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독한 권태와 묵직한 우울을 손에 쥐고는 하루하루 지독하게 살아 숨 쉬는 이유가 무엇인지. 빗소리가 적막을 헤쳐 귀를 때린다.
서랍을 열어 검은 칼을 꺼낸다. 아, 너는 결국 나의 핏물을 맛보게 되려무나. 그 차가운 쇳덩어리에게 시비를 거는 듯이 애써 잠시의 따뜻한 기억을 떠올려본다. 검은 코트를 입고 아직 덜 풀린 날씨에 길을 열고 나섰던 날, 그것은 어린아이가 탁 트인 공기에 첫 숨을 들이마시는 탄생의 기쁨과도 같은 것이었다. 찰나의 생을 맛본 적조차 없었더라면, 그리움조차 없었을 것이다. 푸른 여름이 다가오기 머뭇거렸던 밤의 담배 연기를 기억한다. 돌이켜보니 그날에도 나는 살기가 서린 날에 내 살점을 내주고는 말았다. 따가운 상처 위로 송골송골 맺힌 붉은 습기 위에 눈물을 흘려보내었다. 유독 차가웠던 겨울을 기억한다. 지독히도 외로우며 무섭도록 어두운 가짜 풀밭에서 나는 무릎을 꿇고 그 한기에 온몸을 찢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랑스러운 비극이 이리도 그리울 수가 없다. 결국에 나는 텅 비어버린 것을. 가야만 하는 길에서 고개를 돌리고 나는 눈이 녹아 얼어붙은 덩어리를 맴돌며 도무지 떠나지를 못한다. 얼어붙은 손을 깨뜨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미약하게 펄떡거리는 심장과 쇳소리가 섞인 들숨에도 불구하고 죽어버린 것과 무엇이 다를까.
여러 날이 지난 어느 날을 상상해 본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여전히 날을 세우고 나를 기다리는 칼자루에 기쁘게 목을 바칠 것이다. 얇은 살결에 파고든 것이 흩뿌린 그림이 나의 마지막 유산일 것이며, 바스러진 삶의 조각에서 나라는 인간의 형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뱉어낸 마지막 숨에 모든 고통을 담아내어 굳은 몸으로 여전히 눈을 치켜뜨고는 그제야 편안히 쉼에 고개 숙여 감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