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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부장님의 문자 한 통

누군가의 다정함이, 또 다른 누군가를 성장시킨 이야기

by 서이안

교사들이 가장 긴장하는 시기는 아무래도 새로운 학교로 발령받을 때다. 학교마다 분위기도, 업무 방식도 다르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성향이 지역마다 다르기 때문에 낯선 환경에 들어간다는 건 꽤 큰 도전이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 뒤에는 새로운 인연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그 인연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소중해지기도 한다.


운 좋게 집에서 가까운 학교로 옮기게 됐다.

첫 출근 날, 낯선 교무실에 인사를 하고 자리를 정리하는데, 이전에 그 자리를 쓰던 선생님이 짐을 정리하고 계셨다. 자연스레 이름, 나이, 사는 곳 같은 기본적인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선생님은 나보다 일곱 살 많은 체육부장님이었고 놀랍게도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신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그 인연은 곧 밥 한 끼로, 커피 한 잔으로, 삶을 나누는 대화로 이어졌다.


인간관계로 지나치게 걱정하는 학생들에게 종종 해주는 말이 있다.


"한 반에 서른 명이 있다면,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해 주는 아이가 3~4명쯤 되고, 특별한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아이도 하나쯤은 있어.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더라."


하지만, 체육부장님은 예외였다. 신기하게도 내가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칭찬했다.

항상 웃는 얼굴, 차분한 말투, 조용한 헌신. 말 그대로 '좋은 사람'의 표본이었다.

강당 행사 땐 300개가 넘는 의자를 먼저 나서서 세팅하고, 새벽같이 출근해 피구부 아이들을 지도하며, 체육대회도 즐겁고 화려하게 이끌어냈다. 심지어 학교 행정 업무도 흠 없이 해냈고, 주말이면 시골 본가로 내려가 홀로 계신 어머님을 도왔다.


한 번은 점심을 먹으며 말씀하셨다.

"가끔은 시골로 다시 가고 싶어요. 더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삶이 그리워서요."

그 말은 늘 바쁘게 움직이던 부장님의 얼굴에 잠깐 내려앉은 그림자처럼 오래 남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부장님은 시골 본가에서 직접 보내온 농작물과 해산물, 막걸리까지 한 상자 가득 담아 내게 선물로 주셨다.

"가족들이랑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아버님 입에 막걸리가 맞으면 더 가져다줄게요."

그 말에 묘하게 울컥했다. 내가 받은 따뜻한 마음이 우리 아버지께도 닿는 것 같아서였다.


나는 교사가 된 이후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동료 음악 선생님 덕분에 갖게 된 취미였지만, 언젠가 아이들 앞에서 연주하고 싶다는 작은 꿈이 생겼다. 그래서 점심시간마다 텅 빈 음악실에서 연습을 하곤 했다. 그때였다. 평소 조용했던 학생이, 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저 피아노 치는 거 들어도 돼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점심을 잘 먹지 않던 그 학생은, 그렇게 점심시간에 음악실에 와서 내 연주를 듣게 되었다.

주변 친구들로부터 아이가 노래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아이에게 먼저 축제 무대를 제안했다. 아이는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사춘기 특유의 예민함과 소심함이 공존하는 아이였고, 남 앞에 서는 걸 유독 힘들어했다. 무대 이틀 전까지도 목이 아프다며 갈팡질팡했으니 말 다 했다.


그래도 그 아이는 결국 무대에 섰다. 손디아의 '어른'이라는 곡으로 나는 피아노를 치고, 아이는 노래를 불렀다. 손은 바들바들 떨렸고, 머릿속은 새하얘졌지만, 우리는 겨우겨우 그 무대를 완주했다.


무대가 끝나고, 나는 내가 얼마나 떨렸는지, 아이는 얼마나 용기를 냈는지를 생각하며 혼자 벅찬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부장님께 "오늘 저녁 시간 되면 보자"는 문자가 도착했다. 선약이 있어 죄송하다는 답장을 보냈는데, 그날 밤 11시가 넘어서 부장님께 문자가 도착했다.


"아!! 이안샘~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는데... 오늘 피아노 연주 너무 멋있었어!! ㅎㅎ 잘 자!!"


부장님은 체격이 좋은 체육 선생님이시지만, 누구보다 섬세하신 분이셨다. 그래서 그 짧은 메시지 한 줄이 유독 크게 느껴졌다. 아마 그 한 줄을 보내기까지도 꽤 많은 고민을 하셨으리라. 그 조용한 진심이 마음 깊이 전해졌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생각났다. 오늘 함께 무대에 선 아이에게는 나는 어떤 어른이었을까? 부장님처럼 조용히 응원해 준 사람일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버린 사람일까?


날이 밝자마자, 나는 아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OO아 축제 때 너무 잘했어! 고생 많았어! 선생님은 네가 자랑스러워. ㅎㅎ"

그리고 학교에서 작은 간식 선물과 함께 그 말을 다시 건넸다. 그 아이는 아무 말 없이 웃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아주 조금이나마 아이에게 무언가 남았다는 것을.


다음 해, 그 아이는 음악과 행사인 '작은 음악회'에 자진해서 참여했다. 어느새 마이크를 잡은 손이 덜 떨리고, 목소리는 한층 단단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무대 아래에서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 이 아이가 성장했구나.' 그게 얼마나 감동적인지...

그리고 동시에 이런 질문도 들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부장님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살다 보면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누군가의 조용한 응원, 아무 조건 없는 따뜻함.

그리고 그 안에서 나도 조금 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느끼게 된, 그 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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