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은 그렇게 전해진다
매년 교무실 자리를 옮길 때마다 나는 가장 먼저 세 장의 쪽지를 꺼낸다. 누구는 책부터, 누구는 파일부터 정리하지만, 나는 늘 쪽지부터 책상 위에 붙인다. 그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건네는 작고 조용한 다짐이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별도 떨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괴테의 문장, 그리고 가장 오래, 가장 조심스럽게 붙여두는 수석 선생님의 쪽지.
“TO. 이안 선생님,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콜 하셔요~”
내가 두 번째 학교로 발령받고 모든 것이 낯설던 시절, 그곳엔 정년퇴직을 2년 앞둔 수석 선생님이 계셨다. 교무실 복도를 지나다 마주치면 늘 먼저 웃으며 안부를 물어주셨고, 점심 식사 후에는 아이들과 어울려 스스럼없이 공을 차던 분. 겨울 아침, 등교 지도를 하던 내 손이 꽁꽁 얼어 있자, 말없이 다가와 당신의 낡은 가죽 장갑을 벗어 내 손에 끼워주시던 분. 색소폰이 취미라고 하시며 어느 날엔 교직원들 앞에서 연주해주시기도 했던, 참 멋진 선배님이셨다.
어느 날 수석님은 내게 "사실 이안선생님이 우리 아들이랑 이름도 같고, 나이도 똑같아요"라며 웃으셨다. 그 사소한 우연 하나가, 낯선 교무실에서 나를 안심시키는 가장 큰 인연이 되어주었다.
그분의 다정함은 단순히 따뜻한 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저경력 교사였던 내 안의 가능성을 보고, 성장의 문을 열어주는 진짜 스승이었다. 어느 날 그는 내게 '수업 공개 행사'를 제안하셨다. 교장, 교감 선생님부터 타 학교 선생님들까지 모두가 지켜보는 수업이었다. 부담감에 망설일 법도 했지만, 수석님의 믿음 어린 눈빛에 나는 "네!" 하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한 달 내내 수업 하나만을 고민하고 준비했다. 1시간의 수업을 위해 그토록 긴 시간을 들인 것은, 교사로서 나에게도 깊은 배움이자 성장의 경험이었다. 그때 나는 수석실을 찾아가 좋은 수업이 무엇인지 여쭙곤 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좋은 수업의 원칙은 세 가지예요. 아이들을 움직이게 하고, 말하게 하고, 웃게 하세요." 그 조언은 지금도 수업을 준비할 때마다 내 귓가에 맴돈다. 행사가 끝난 뒤, 수석님은 "고생했다"며 내 등을 두드려주며 따뜻한 밥을 사주셨다. 그 밥의 온기와 함께, 나는 교사로서 수업을 대하는 진정한 태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수업 기술보다 더 깊이 내 마음에 남은 것은, 아이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생활지도로 지쳐가는 내게, 수석님은 늘 "아이들은 가만히 둬도 잘 자라요. 많이 예뻐해 주세요"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체육대회 점심시간, 유행하는 케이팝에 맞춰 전교생이 춤을 추는 '랜덤플레이댄스' 시간이면, 그는 늘 아이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정년퇴직을 앞둔 나이에도, 부끄럼 없이 아이들과 어울려 서툰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아,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러, 수석님의 마지막 퇴직일이 다가왔다. 그는 나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가장 묵직한 방식으로 남겨주었다. 어느 날 수석실로 나를 불렀다. 그곳에는 평생 모아 오신 100권이 넘는 책들이 상자에 담겨 있었다. "이안 선생님, 책 좋아하니까. 이 책들 다 가져가서 읽어요."
새 책도 많았고, 교육에 대한 그의 치열한 고민이 담긴 책들도 많았다. 나는 너무나 큰 선물을 받아 행복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짠해왔다. 한평생 교직에 헌신한 수석님의 모든 것이, 이제 나에게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책을 들고 나오는 내게, 그는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잘 읽어요." 그 악수의 온기가, 그날따라 유난히 뜨거웠다.
어느 날, 줄곧 막내였던 나를 이어 4살 어린 후배 교사가 들어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개학 전, 그에게 미리 메시지를 보냈다.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주세요.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내가 받았던 다정함이, 내 손을 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흘러가고 있었다. 책상 한 편의 쪽지는 오늘도 조용히 내게 말해준다.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콜 하셔요~" 그 말 한 줄이 사람을 얼마나 오래 지탱할 수 있는지 나는 안다. 그리고 나는, 수석님이 남겨주신 책들을 읽으며 그의 길을 따라 걷는다.
최근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멈추지 않는 그의 열정과 다정함이 한데 어우러진 삶의 자세야말로 내가 그분에게서 배운 위대한 선물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