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이들의 '믿을 구석'이 되려는 이유
교실 구석에서 홀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를 볼 때면, 15년 전의 나를 만난다.
중학생 때, 나만 낯선 학교에 배정되었다. 친구가 간절했지만, 친구 사귀는 법을 몰랐던 나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폭력은 여러 얼굴로 내게 찾아왔다. 태권도부였던 같은 반 아이는 뚱뚱하다며 나를 놀리며 때렸고,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은 내 돈을 빼앗았다. 천 원, 이천 원, 때로는 오천 원. 그리고 나는 바보처럼 저항하지 못했다. 돈을 '빌려달라'는 여학생에게 넙죽넙죽 돈을 주었다. 물론 돌려받은 적은 없었다.
반장 아이는 그 당시 유행했던 이효리의 'Hey Mr. Big' 노래에 맞춰 목도리로 내 얼굴을 때리며 놀렸고, 나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멋쩍게 웃고만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친구’가 아니라 ‘만만한 애’였을 뿐이다.
점심시간이면 내 반찬을 뺏어가는 아이들 앞에서 한마디도 못 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워, 결국 한동안 밥을 굶기 시작했다.(내가 무료급식 대상자라는 것도 점심을 굶는데 한몫했다.) 점심시간이면 반에 엎드려 누워있었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제발 나 좀 누가 쳐다봐주세요. 말 좀 걸어주세요.’라며 누구보다 크게 외쳤던 것 같다.
2학년이 된 후 어느 날 점심시간, 다른 반으로 떨어진 태권도부 아이가 우리 반에 찾아와 나를 교실 뒤편으로 끌고 갔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내가 잘못한 일은 없었다. 그는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장난과 폭력의 경계를 넘나들며 꽤 긴 시간 나를 때렸다. 종이 치자 끝났다. 아팠고, 서러워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나를 더 아프게 했던 것은, 그 폭력의 시간이 아니었다. 나를 가장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은, 교실 안에 흐르던 서늘한 공기였다. 몇몇은 무표정으로 지켜봤고, 대부분은 내가 맞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떠들고 놀았다. 그 넓은 교실에서, 나를 위해 선생님께 달려가 주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보복이 두려웠을 수도 있고, 덩치 큰 내가 맞는 모습이 우스웠을 수도 있다. 혹은 내 성격상 크게 저항하지 않아서 그저 장난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날 나는 방관이라는 이름의 더 서늘한 폭력 속에서 세상에 기댈 곳 하나 없는 섬이 되었다.
심지어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은, 몇몇 선생님들 앞에서는 애교 많고 예쁨 받는 학생이었다. 선생님들은 어떤 학생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좋은 의도를 가졌겠지만, 그 다정함은 내게 절망감을 주었다. 나에게는 악마인 아이가 선생님에게는 천사일 수 있다는 모순 앞에서, 나는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삼켜버렸다. 선생님조차 그 아이의 편인 것 같은 세상에서, 내 편은 어디에도 없었다.
교사가 된 지금, 나는 한없이 행복하게 웃는 아이들의 얼굴만 봐도 이유 없이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다. 나는 중학생 때 저렇게 크게 웃어본 적이 몇 번이나 될까. 각자 사연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서만큼은 행복하게 웃으며 지낼 수 있다면, 그 모습을 내가 지켜봐 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오른다.
그래서 나는 매년 아이들에게 비슷한 약속을 한다.
“선생님은 너희 편이야. 잘못했을 때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지막 편이 될 거야. 잘못을 하면 바로잡을 거고,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애쓸 거야. 그러니 언제든 숨기지 말고 말해줘.”
그 약속 때문일까, 아이들은 내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해 준다. 친구에게 놀림받아 힘들다는 이야기까지 내게 털어놓을 때면, 걱정되는 마음과 동시에 깊은 안도감이 든다. ‘아, 이 아이가 나에게 기대어 주었구나. 15년 전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믿을 구석’이, 이제 내가 되어주고 있구나.’ 물론 그 약속이 때로는 아이들이 나를 지나치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딜레마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두렵다. 나를 괴롭혔던 아이들과 닮은 제자들도 사랑할 수 있을까. 술, 담배에 일찍 손을 댄 아이들과 상담을 하고, 사제동행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고, 따로 밥을 사주기도 하면서 나는 여전히 그들과 가까워지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학창 시절 나는 선생님들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마음속 깊은 상처까지 털어놓을 ‘믿을 구석’을 찾지는 못했다. 분명 믿을 만한 선생님이 계셨을 것이다. 하지만 내 존재가 까발려지는 것이 두려웠고, 그래서 용기조차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매일 교실을 두루두루 살핀다. 혹시 표정이 어두운 아이가 있는지, 혼자 외롭게 있는 아이는 없는지. 그들을 먼저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용기 낼 수 있도록 믿을 구석이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 애쓴다.
나는 멈출 수 없다. 이것은 15년 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던 소년이었던 나를 향한, 교사가 된 지금 나의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그리고 혹시 당신의 곁에도 오늘 혼자 눈물 삼키는 아이가 있지 않은가. 그 아이에게 잠시만이라도 기대어 쉴 수 있는 '믿을 구석'이 되어 줄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