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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별이 될 수 있을까?

말 한마디에 흔들리지 않는 법

by 서이안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만, 때로는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런 말들에 자주 흔들렸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그 말들이 내 인생을 망가뜨린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별이 되어 있었다.


어린이집 다니던 시절, 버스 자리를 잘못 앉은 내게 선생님이 무심코 말했다. “옆으로 가, 돼지야.” 곧바로 사과를 받았지만, 그 순간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자주 듣던 말이라 낯설지 않았지만, 그 사과 덕분에 '아, 누군가에게는 말 한마디가 깊은 상처가 될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


그 상처는 중학생 때 굳은살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 학원 영어 선생님이 내 팔뚝을 여학생과 비교하자 주변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나는 그 안에서 더 작아졌다. 그 후로 반팔티를 입을 때면 거울 속 팔뚝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선생님은 시험 전날 나와 함께 늦게까지 학원에 남아 내게 모르는 문제를 친절히 알려주고는 "지금부터 너를 위해 기도할게"라는 메일까지 보내며 응원했다. 하지만 상처에 집중했던 나는 그런 따뜻함을 기억하기보단 상처를 준 한마디만 곱씹었다.


중3 때 담임이었던 국어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교과서 한 장면을 보며 "이안이 몸집보다도 더 크네" 하고 던진 말은 친구들의 재치 있는 반응으로 증폭되었다. 나는 ‘뚱뚱하고 못난 나’라는 틀을 스스로 씌우고, 그 틀 속에 갇혀 버렸다. 그 기억들이 때로는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나는 오랫동안 상처를 준 사람들의 그 '한마디'만을 기억했다. 그 기억의 파편들을 껴안고 온전한 그림을 보게 된 것은, 수업 중 내 몸에 대해 농담을 던졌던 중3 담임선생님과의 재회 덕분이었다.

퇴직을 1년 앞둔 그 담임선생님과 우연히 다시 만나 동료로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퇴직을 앞뒀지만 여전히 묵묵히 일하시는 선생님을 보며, 숨겨진 다른 순간들을 기억해 냈다. 생각해 보니 그분은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나를 교무실로 불러 여러 번 진심 어린 상담을 해주셨고, 체육대회가 끝난 뒤엔 사비로 우리 반 간식을 챙겨주셨다. 무뚝뚝한 표정 뒤에 늘 성실한 돌봄이 있었던 것이다. 오래 전의 한 마디만으로 그 사람 전체를 평가했던 내 태도가 부끄러웠다.


가장 깊게 다쳐 있었던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연인이 헤어짐의 순간에 내 정체성을 흔들었다.

"오빠는 너무 외로워서 책이랑 영화로 도망치는 것 같아."

그 문장은 내게서 정체성의 근거를 빼앗았다. 며칠, 몇 달을 두고도 그 말의 잔상이 마음을 괴롭혔다.


그럼에도 나는 결국 다른 결정을 하기로 했다. 과거의 말들이 나를 규정하게 두지 않기로. 누군가의 실수에만 매달려 그 사람 전체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사람이란 복합적이고 모순적이다. 누군가는 날 다치게 했지만, 같은 사람은 날 도운 적도 있다. 그 둘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 내게는 더 진실한 기억법이었다.

최근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교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너무 맛있다고 감탄했을 때, 한 선배가 툭 던졌다.

"이안 샘, 너무 오버하면 사람들이 싫어할지도 몰라."

예전의 나라면 그 한마디로 하루 종일 움츠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웃음으로 넘긴다. 모든 말이 나에 대한 최종 판단은 아니며, 누구나 무심코 던진 말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말에 굳이 일부로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말 한마디가 가시가 되어 나를 찌를 때, 나는 항상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다.

하나는 상처에 매달려 상대를 단죄하고 내 상처를 정당화하는 길.

다른 하나는 실수는 실수로 받아들이되, 그 사람의 다른 면을 보려 애쓰는 길.

나는 후자를 택한다. 그 길이 내 마음을 더 평온하게 하고, 내 앞의 아이들에게도 더 너그러워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도 말의 무게를 자주 이야기한다. "말은 누군가의 하루를 바꿀 수 있어. 그러니 조금 느리게, 조금 더 살피며 말하자."

동시에 나는 말 한마디로 깊게 상처받은 제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말이 네 전부가 아니야. 네가 누구인지 함께 찾아보자."


상처는 여전히 아프지만,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밤하늘의 작은 별처럼, 지나간 상처들이 내가 가야 할 길을 은근히 비추는 이정표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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