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잃어버린 10대에 대하여
삶은 상실의 연속이다. 지난 독서 모임에서 읽은 유디트 샬란스키의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살아 있다는 건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내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모임 당일, 리더님은 우리에게 물었다.
"여러분 각자의 삶에서 경험한 상실은 무엇인가요?"
먼저 입을 연 것은 40대 중반의 미혼 남성분이었다. 대기업에 다니며 남들이 보기엔 성공한 삶이었지만,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잃어버린 청춘’에 대해 이야기했다. 시험, 대학, 취업이라는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청춘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것 같다고. 그는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낡은 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한 남자의 붉어진 눈시울은 그 어떤 눈물보다 무겁게 마음을 움직였다.
뒤이어 한 어머님도 공감하며 말했다.
“27살에 결혼해서 딸을 낳고 키웠는데요, 돌아보니 저의 30대를 통째로 잃어버렸더라고요.”
‘30대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 말속에는 말로 다 표현되지 않는 피로와 침묵, 그리고 삶을 온전히 누군가에게 내어준 시간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의 고백을 들으며, 정작 나 자신의 상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놀랍게도, 나의 10대 시절이었다.
나는 10대 초반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예민한 아이였던 것 같다. 뚱뚱하다는 놀림에 더해, '할아버지'라는 새로운 별명까지 얻었다. 많은 놀림이 기억난다. 한 번은 한참 이성에 눈뜨던 중학교 1학년 때였다. 하굣길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는데, 같은 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 몇몇이 다가와 내 옆에서 킥킥대기 시작했다. ”야, 저기 봐. 흰머리.”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바람보다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나는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버스가 오려면 한참 남았는데도, 오직 전광판의 숫자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척,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 채로 버스만 기다리던 그 몇 분이, 내 10대의 어떤 시간보다 길고 무거웠다. 고등학생 즈음에는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아졌다. 놀림은 여전히 두려웠지만, 염색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왠지 세상을 향해, 나를 놀리는 그 모든 것들을 향해 굴복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것은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작은 저항이었다.
나의 그 서툰 저항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끝이 났다. 대학교라는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며, 처음으로 머리를 염색했다. 그 후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염색으로 나의 진짜 머리색을 감추며 살아간다. 나의 흰머리는, 내가 치열하게 통과해 온 시간의 훈장이 아니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흘려보내야 했던 나의 잃어버린 10대가 남긴 영수증과도 같았다.
물론 그 시절에도 빛나는 순간은 있었다. 나를 일으켜준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 내 곁을 지켜준 몇 안 되는 친구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쉬움이 더 크다. 더 많이 웃고 덜 걱정하며 보냈어야 할 그 찬란한 시간을, 나는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상처의 기억이 더 많다.
그리고 이제 나는 교실의 아이들을 본다. 내 눈앞에서,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열네 살, 열다섯 살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의 사소한 농담, 빛나는 눈빛, 서툰 우정의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나의 '잃어버린 10대'를 통해 배웠다.
작가의 말처럼, 살아 있다는 것은 상실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상실을 기억하는 순간, 새로운 소명을 발견한다고 믿는다. 나의 잃어버린 10대는, 이제 내 앞의 아이들의 10대를 하나하나 소중히 기억하고 지켜봐 주어야 한다는 간절한 소명이 되었다. 아이들이 훗날 자신의 10대를 돌아보았을 때, '그때 나를 온전히 바라봐 주던 어른이 있었다'라고 추억하게 해주고 싶다.
기억은 사랑처럼 남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며 살아가려 한다. 그것이 상처와 상실을 경험한 내가, 교사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남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