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몸, 살아내는 마음
중학교 2학년, 과학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수업 중에 내게 몸무게가 몇 킬로그램이냐고 물으셨다.
너무 당황해서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했지만, 그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끈질기게 다시 물었고, 나는 옆에 있던 아이들과 선생님의 시선을 피하려 애썼다. 짝사랑하는 친구도 있었기에 그 순간은 더 참기 어려웠다. 수업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가슴이 쿵쾅거렸다. 내 몸이, 내 존재가 수업의 소재가 되는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 선생님은 남자아이들을 복도에 엎드리게 해 놓고 전깃줄로 엉덩이를 때리기도 했다. 나는 그날, 다짐했다. ‘저런 교사는 되지 말자.’ 몸을 향한 폭력, 마음을 향한 폭력, 그 둘은 닮아 있었다.
돌이켜보면 상처는 학교에만 있지 않았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내게 늘 살을 빼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렇게 뚱뚱하지도 않았다. 다만 또래보다 약간 덩치가 있었을 뿐이었다. 부모님은 바빴고, 냉장고에는 늘 인스턴트식품뿐이었다. 그 환경에서 살이 찌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매번 듣는 말은 같았다. “살 좀 빼.”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는 나를 '뚱띵이'라고 불렀다. 애칭이라고 생각하셨을까? 하지만 그 단어는 내 마음을 가장 깊이 아프게 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나를 멀리한 시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뚱뚱해서 냄새난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나는, 어느 날 창문에 김이 서린 틈을 타 '뚱띵'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 걸 보고, 지우지도 못한 채 애써 외면했다. 누군가 뒤에서 내 욕을 하는 걸 들었을 때도, 선생님에게 말하지 못했다. 말하는 순간 내 수치가 세상에 알려질 것만 같아서였다.
그 침묵은 교회에서도 반복됐다. 젊은 목사님은 설교 중에 여러 차례 내 몸을 언급하곤 했다. "이안이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기울 것 같다"는 말에 아이들이 웃었다. 교회 차에 타면 "이안이가 탄 쪽으로 차가 기울 것 같다"며 주변 아이들을 웃겼다. 나는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관계가 깨어질까 두렵고, 나를 싫어할까 두려워서. 나는 그렇게 나를 점점 작게 만들어 갔다.
책이 나의 피난처였다. 외국에서는 외모 지적이 큰 실례라는 이야기, 다이어트가 최고의 복수라는 문장, 몸에 대한 사회의 기준을 비판하는 글들을 읽으며 나는 내 몸을, 내 존재를 보호받는 느낌을 받았다. 책 속에서만큼은 내가 지켜졌다.
대학교에 들어가 집에서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 억눌렸던 감정은 폭식으로 이어졌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먹었다. 돈을 벌어 처음으로 자유롭게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을 수 있었지만, 그 자유는 위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체중은 200kg에 가까웠고, 일반 체중계로는 무게를 잴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 대학교를 휴학하고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1년 동안 무려 120kg 이상을 감량했다. 주변 사람들은 놀라워했고,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원하는 옷을 마음껏 입을 수 있었다. 달라진 몸은 분명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 세계 속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변한 건 몸인데, 왜 마음은 여전히 무겁지?’ 그런 질문이 따라왔다. 몸이 가벼워져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었다.
그 경험은 내게 또 하나의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변화가 중요하지만, 그 변화는 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사랑해도 된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다시 살이 조금 찌기도 했고, 예전처럼 날씬하지도 않다. 하지만 어깨를 펴고 걷는다. 어디를 가든 웃고, 다정하게 인사한다. 나를 지우지 않고 살아간다.
나는 지금 내가 어릴 때 가장 원했던 '다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애쓴다. 마스크를 벗지 못하던 아이에게 "네 얼굴 참 보기 좋다"라고 말해주고, 지각을 자주 하던 아이가 수업에 들어오면 “그래도 오려고 한 마음이 대단하다”며 박수를 쳐준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또 다른 ‘말의 상처’가 될까 조심스럽지만,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진심 어린 말 한마디가 어떤 날에는 사람을 살린다는 것을.
말은 가볍지만, 오래 남는다. 누군가를 구할 수 있고, 상처로도 남는다.
나는 안다. 나를 울렸던 말들. 그리고 나를 일으켜 준 말들.
그래서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은 어떤 말 한마디로, 아이의 마음에 머물 수 있을까?”
살아남은 몸으로,
살아내는 마음으로,
다시 한 걸음, 다정하게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