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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나의 성적표였다.

숫자가 아닌 마음을 인정받고 싶었던 어린 시절

by 서이안

어른들은 늘 물었다.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나는 늘 망설였다. 그러면 아버지가 답을 대신 주셨다.

“판검사라고 해라.”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몰랐다. 다만 어른들의 얼굴이 환해지고, 아버지의 어깨가 조금 더 펴지는 단어라는 건 알았다. 그 후로 내 꿈은 오랫동안 판검사였다.


행복의 기준은 언제나 아버지의 표정이었다.

중학교 첫 시험.

반 3등을 했다는 내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하셨다.

“3등? 1등 아니고?”

순식간에 성취감은 사라졌다. 내 성적표는 숫자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미간이 성적이었고, 입꼬리가 점수였다.


중학교 2학년.

성적표에 ‘수’라는 점수들 사이로 ‘우’ 하나가 찍혔다. 체육 수행평가 때문이었다. 아파트 놀이터 앞에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 시간을 서성였다.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찌푸리실까, 말없이 한숨만 쉬실까. 결국 들어갔지만, 별다른 말씀 없으셨다. 그날 나는 알았다. 1등이 아니면 아버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이를 악물었다. 중3이 되던 해, 처음으로 1등을 했다. 아버지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으셨다. 하지만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당시 우리 중학교에는 1등이 반 친구들에게 간식을 돌리는 이상한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반에선 피자와 치킨이 돌았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친구들은 “우리 반 1등은 뭐 없냐?”며 눈치를 주었다.

형편상 간식을 돌리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아버지의 환한 웃음 뒤에 나만의 초조함이 따라붙었다. 나는 그때부터 기쁨과 불안을 함께 삼키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의 웃음이 전부인 줄 알던 세계에, 균열이 생긴 건 고등학교 때였다. 뜻밖에도 한 편의 시 때문이었다. 국어 선생님의 권유로 대회에 시를 써냈다. 유관순을 주제로 쓴 시였다. 상은 못 받았지만, 선생님은 내 시를 읽고 말씀하셨다.

“이안아, 너는 참 따뜻한 시를 쓰는구나.”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이 아닌 내 글이 나를 증명해 준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내 곁에는 또 다른 어른들이 있었다. 무섭기로 소문났지만 아무도 모르게 나를 장학생으로 추천해 주신 부장 선생님. 늘 철저한 준비와 재미있는 수업으로 숨통을 틔워주신 일본어 선생님. 내 낡은 체육복을 보시곤 조용히 새것을 챙겨주신 체육 선생님. 언제든 마음을 털어놓게 해 주신 상담 선생님. 그분들은 점수가 아닌 ‘나’를 보아주셨다. 나는 그분들을 전부 합친 것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3학년, 처음으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셨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내 나를 거실로 부르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법도 좋지만, 교육도 의미 있는 길이지. 네가 원한다면 아빠는 지지한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표정 너머에서 내 진짜 꿈을 붙잡았다.


교사가 된 지금, 나는 성적표를 받아 들고 교무실 문 앞에서 망설이는 아이들의 표정을 오래 들여다본다. 그 표정 속에, 중2 시절 놀이터에 서성이던 내가 겹쳐 보인다.

저 종이 한 장에 찍힌 숫자가 아이의 존재를 재단하지 않기를. 세상에는 성적표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종류의 1등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의 표정을 살피느라 자신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의 어깨를 말없이 다독여주고 싶다.


괜찮다고.


너의 가치는 그 표정에 있지 않다고.


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나의 유일한 성적표였던 그 시절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다.


아버지가 써주신 유일한, 그리고 소중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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