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한마디
어린 시절, 아버지는 무너지지 않는 벽 같았다.
7살 때 같이 살던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21살 때 친할머니가 암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셨을 때도 아버지는 울지 않으셨다. 장례식장 한편에서 3일 내내 상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지켜내는 아버지의 굽은 등은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으로 단단해 보였다.
아버지는 때로는 엄격하셨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도 종종 종아리를 맞았다. 동생과 싸우거나, 엄마에게 대들거나, 어른들께 예의 없이 행동했을 때 회초리가 내려왔다.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와는 맞지 않지만, 선을 넘었을 때 단호했던 아버지 덕분에 예의를 배울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무섭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 엄격함 뒤에는 언제나 지켜야 할 원칙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본 것은 평생 단 두 번뿐이었다.
한 번은 할아버지의 3주기 추도 예배 날,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찬송가를 부르다 말고 조용히 눈시울을 붉히셨을 때였다. 또 한 번은 내가 초등학생 때, 택시 기사인 아버지께서 택시비를 떼이고 들어온 새벽이었다. 술에 취해 들어오신 아버지는 어머니 옆에 누워 흐느끼며 말씀하셨다.
“남들이 택시비 떼일 때는 뭐 그런 걸 당하냐고 했거든. 그런데 내가 당하니까 내가 너무 등신 같더라..”
나는 자는 척 누워 아버지의 흐느낌을 들으며, 저 거대한 벽에도 균열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러나 그 두 번의 울음마저도, 어느 늦은 밤의 작은 중얼거림 앞에서는 희미해졌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신지 5년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날 택시 운행이 끝나고 술에 취해 돌아온 아버지는 거실 바닥에 드러누우셨다. 한참 뒤척이시던 아버지 입에서 아주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
세상에서 가장 강한 줄로만 알았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세상에서 가장 작고 여린 한마디였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택시 기사도, 두 아들의 아버지도 아닌, 그저 엄마가 보고 싶은 한 외로운 아들의 모습을. 부모님을 모두 여읜 뒤 세상에 기댈 곳 하나 없는 남자의 가장 깊은 슬픔을. 그 소리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처럼 어둠 속을 파고들어 내 심장에 박혔다.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아버지는 여전히 꿈에서 할머니가 나왔다며 납골당을 찾아가곤 한다. 더 이상 아버지는 나에게 산처럼 높은 존재도, 무너지지 않는 벽도 아니었다. 그저 외로워하고, 상처받고, 때로는 길을 잃는 한 사람으로 보였다.
아버지의 사랑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전해졌다.
여름 저녁, 본가에 도착하면 내 방 에어컨이 미리 켜져 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조용히 선풍기를 내 쪽으로 돌려주신다.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거의 없지만, 그 침묵 속의 다정함이 나를 오래도록 붙잡아 주었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날 때면, 아버지의 그 여린 뒷모습이 종종 떠오른다.
있는 힘껏 가시를 세우고 세상과 맞서는 아이들, 반항으로만 말하는 아이들을 마주할 때면 그날 밤 아버지의 중얼거림이 겹쳐진다.
어쩌면 그 아이들의 가장 큰 반항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세상에 대고 외치는 “엄마”라는 슬픈 외침은 아닐까.
나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어른이고 싶다.
세상의 모든 강한 등 뒤에 숨어 있는 여린 소년의 울음을 들을 수 있는, 그런 다정한 교사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