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명절이 쓸쓸한 당신에게

사라진 것과 남아있는 것에 대하여

by 서이안

명절 연휴가 시작되었다. 우리 반 단톡에도 제자들의 가족 여행 사진이 올라왔다. 친한 동료 교사들도 저마다의 여행길에 올랐다. 멀리는 유럽, 가까이는 제주도까지.

나의 명절은 조금 다르다. 명절이면 으레 그렇듯 택시 운행을 나가는 아버지를 배웅하고, 홀로 남은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고 집을 나선다. 북적이는 공항과 고속도로의 풍경을 뒤로하고, 나는 비 내리는 동네 카페 구석에 앉아 책과 노트북을 꺼냈다.


언제부터였을까. 명절이 내게 쓸쓸한 풍경으로 남기 시작한 것은.


아마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였을 것이다.


학창 시절, 명절의 기억은 늘 할머니 집의 온기로 가득했다. 시험 기간이라 공부하다 늦게 도착한 나를 보고 "이제 왔냐"며 서운함을 애써 감추시던 할머니의 목소리. 밥을 먹고 왔다는 손주에게 기어이 새 밥과 맛있는 반찬을 한 상 차려주시던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 그 모든 것이 나의 명절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 판정을 받으신 할머니. 어쩌면 당신은, 공부하는 손주에게 방해가 될까 봐 아픈 몸을 혼자서 꾹꾹 참아내셨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마음 한쪽이 아려온다.


할머니가 떠난 후, 나의 명절은 갈 곳을 잃었다. 이제 명절의 풍경은 소박해졌다. 북적이던 친척들 대신, 어머니가 부쳐주신 전 몇 가지가 상에 오를 뿐이다. 그 소박한 풍경 위로, 나는 자꾸만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어느새 바로 내 곁에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늘 '일하는 모습'이다. 20년 넘게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신 어머니. 하루 종일 뜨거운 불 앞에서 땀 흘렸을 당신의 고단함을, 교사가 된 후에야 조금은 알 것 같다. 학생과 교사가 중심인 학교라는 공간에서, 조리원이었던 어머니가 느꼈을 소외감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얼마 전, 어느 학교에서 학생이 천 명이 넘는데 조리원을 구하지 못해 급식을 두 명이 만들었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 불 앞에 서 계셨을 어머니의 땀이 떠올라 가슴이 저려왔다.


더 어릴 적, 어머니는 우유와 신문 배달을 하셨다. 일곱 살이었던 나는, 새벽에 잠이 깨면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 혼자 옷을 챙겨 입고 놀이터로 나갔다. 아파트 마지막 동 배달을 마치고 돌아올 엄마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미끄럼틀을 몇 번 타고 있으면, 저 멀리서 끌차를 끄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이안아!"

나를 부르며 환하게 웃던 젊은 엄마의 얼굴. 그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연휴 첫날, 카페에서 책 읽고 글을 쓰다 이른 저녁에 집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여전히 택시 운행 중이셨고, 어머니는 혼자 라면을 끓여 드시고 계셨다. 내가 들어서는 소리에, 당신의 저녁은 뒷전이라는 듯 "저녁 뭐해줄까?"라고 먼저 물으신다. 그 순간, 목이 멨다. 전자기기 다루는 게 서툴러 늘 도움을 청하던 어머니, 운전을 못 해 차 태워달라 하시던 어머니. 그 모든 순간에 나는 왜 더 다정하지 못했을까.


"저녁 뭐 해줄까?" 묻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 위로, 새벽 놀이터에서 나를 보며 웃던 젊은 엄마의 얼굴이 겹쳐졌다. 어머니의 사랑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 변한 것은 세월과, 그 사랑을 무심하게 받아들인 나 자신이었다.


그날 밤, 나는 산책을 핑계로 집을 나와 은행에 들렀다. 부모님께 드릴 용돈을 뽑았다. 현금으로 드려야 더 좋아하시는 부모님을 위한, 말로 다 표현 못 하는 나의 서툰 감사 편지다. 평소에는 차마 전하지 못했던 감사함과 죄송함, 그리고 사랑을 그 안에 함께 눌러 담았다.


그 차가운 현금을 손에 쥐고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언젠가 할머니를 그리워하듯, "저녁 뭐 해줄까?" 묻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사무치게 그리워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사실을.


사라진 것들을 통해, 남아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올해의 쓸쓸한 명절에게서 받은 가장 큰, 그리고 가장 따뜻한 선물이었다.

keyword
이전 09화세상에서 가장 슬펐던 ‘엄마’라는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