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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제, 그 이름이 가장 존경스럽다.

by 서이안

자이언티의 노래 ‘양화대교’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멈춰 서서 가사를 곱씹었다.


“우리 집에는, 매일 나 홀로 있었지, 아버지는 택시드라이버”


노래 가사가 내 이야기와 닮았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도 평생 택시를 몰았다. 새벽에 나가 다음 날 새벽에야 들어오셨다. 아버지의 오랜 꿈은 개인택시 명단에 오르는 것이었고, 옷장엔 늘 유니폼뿐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택시를 타고 등교한 적이 몇 번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잊히지 않는 날이 있다. 중학생 때, 무료 급식 신청서를 제출하러 가던 날이었다. 좁은 택시 안에서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혹시라도 구겨질세라 책 사이에 넣은 신청서 한 장이 내 가난의 증거인 것만 같아 창피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아버지는, 룸미러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시더니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그런 거 낸다고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라.”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아버지의 그 다정한 위로가, 오히려 우리의 가난을 현실로 못 박는 것 같아 더 비참했다. 그날 이후, 내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직업과 가난에 대한 부끄러움이 싹텄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훗날 나를 가장 비겁한 아들로 만들었다.


대학 시절, 형들과 늦게까지 어울리던 밤이었다. 한껏 들뜬 기분으로 택시를 잡으려던 순간, 나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저만치 앞에 정차된 택시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나의 아버지였다. 형들이 그 택시를 타려던 찰나, 나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 형들! 그냥 여기서 좀 더 놀다 가요!"


나는 왜 아는 척하지 않았을까. 왜 "아빠!" 하고 달려가 반갑게 인사하지 않았을까. 그 순간, 나는 아버지의 직업이, 택시 기사 복장을 입은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은 나를 가장 비겁하고 못난 아들로 만들었다.


다음 날,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제 혹시 아빠 만났니? 아빠가 너 봤다던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못 봤어요'라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아들을 보고도 아는 척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 아들을 봤다는 사실조차 아내를 통해 전해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지,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죄책감은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녔다.


얼마 전, 동료 부장님과 마트에서 장을 보다 우연히 그의 아이들과 친구들을 마주쳤다. "아빠! 다 사줄 거지?"라며 달려드는 아이들을 보며 난감해하던 부장님은, 이내 "멋진 아빠 한 번 돼보려고요"라며 아이들이 원하는 과자를 한 아름 사주셨다. 그 모습을 보는데 문득 우리 아버지가 떠올랐다.


우리 아버지도 평생 '멋진 아빠'가 되고 싶으셨을 것이다. 작년에 혼자 일본 여행을 갔다가 아버지 드릴 사케를 사 온 적이 있다. 사케 한 병을 몇 달이나 아껴두었다가, 손님이 왔을 때 "아들이 사 온 거야"라며 자랑스레 내놓으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평생 자신을 위해서는 돈 한 푼 허투루 쓰지 않으면서도, 아들을 자신의 가장 큰 자부심으로 삼았다.


비로소 깨닫는다. 아버지는 단 한순간도 부끄러운 존재였던 적이 없다는 것을. 부끄러웠던 것은 아버지의 직업이 아니라, 세상을 편견으로만 바라보던 나의 미성숙한 시선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날의 일을 사과하지 못했다. "그때는 아버지가 부끄러웠어요"라는 말이, 내 입을 통과하는 순간 아버지가 받으실 상처가 두렵기 때문이다. 아마 평생 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말로 하지 못하는 사과를 글로 쓰는 것, 아버지의 삶을 존경의 언어로 기록하는 것. 이것이 내가 아들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사과이자, 가장 깊은 사랑의 고백임을.


나의 아버지는 택시 기사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 인생 가장 존경스러운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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