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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날, 피자는 왜 맛이 없었을까

by 서이안

초·중·고 졸업식 날, 부모님은 한 번도 오시지 않았다.

교실마다 꽃다발과 카메라가 가득했지만 내 자리만 시간이 멈춘 듯 텅 비어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아버지는 택시 운행을, 어머니는 학교 급식실 일을 하셨다. 나는 운 좋게 장학금을 받아 상장을 들고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아들이 장학금을 받아왔으니 오늘 저녁은 특별히 피자다.”


그 당시 3만 원이 넘던 M사 피자 한 판은 우리 집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였다. 고소한 치즈 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괜히 투덜댔다.

“생각보다 별로예요.”


덜컥 ‘맛있다’고 해버리면, 이 비싼 피자를 아버지가 또 무리해서 사주실 것만 같았다. 졸업식에 오지 못한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보다, 맛있지만 거짓말을 해야 하는 내가 더 슬펐다.


중학교 졸업식 날도 사정은 같았다. 아버지는 잠깐이라도 들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만류했다. 사춘기 소년의 치기 어린 자존심은 아버지의 직업을 부끄러워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역시 부모님은 일터에 계셨고, 나 역시 더는 기대하지 않았다. 대학교 졸업식 때만큼은 부모님과 멋진 기념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하필 코로나로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결국 나는 초·중·고·대학교, 부모님과 함께 찍은 졸업사진 한 장 남지 않았다.


교사가 되고서야 비로소 부모님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몇 년째 같은 옷을 돌려 입으면서도 아들의 옷은 계절마다 사주셨던 아버지. 교통비를 아끼려 새벽 두 시에 일어나 공짜로 얻어온 자전거로 11km를 달리며 출근하시는 아버지의 굽은 등.

그리고 급식 조리원으로 한여름에도 불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셨을 어머니. 내가 교사가 되고 나서야, 교사와 학생이 중심인 학교에서 어머니가 느꼈을 소외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교실에서, 나는 또 다른 빈자리를 보았다.

행사 날마다 부모가 오지 못하는 아이들.

그 쓸쓸한 뒷모습에 내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다.


한 아이가 있었다.

피부가 하얗고 키도 커서 인기가 많던 아이였다.

마트 계산원으로 바쁜 어머니, 어린 동생과 셋이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아이는 지각이 잦아졌고, 수업 시간엔 무기력하게 엎드려 있었다. 이내 담배와 술로 위태로운 선을 넘나들었다.


겉으로 보이는 반항은 사실,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구조 신호였다.

‘제발 저를 좀 제대로 봐주세요’라는 외침이었다.

아이가 문자로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했을 때, 담임 선생님과 부장님이 아이를 찾아 학교로 데려왔다. 그러나 아이의 어머니는 끝내 일 때문에 오실 수 없었다.


아이의 공허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시간을 거슬러 졸업식 의자에 홀로 앉아 있던 어린 내가 보였다.

그때 알았다.

빈자리는 결핍의 증거가 아니라, 지독한 현실과 싸워낸 부모의 사랑이 남긴 아픈 그림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 쓸쓸함을 아는 교사인 내가 아이에게 가장 먼저 보여줘야 할 것은 다그침이나 훈계가 아닌, 다정함을 바탕으로 한 환대와 연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는 내가 부모님께 피자를 시켜드린다.

더 근사한 식당도 갈 수 있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거실에 둘러앉아 먹는 피자 한 판을 가장 좋아하신다.


어릴 적 내게 오지 못했던 부모님. 그때는 서운했지만 이제는 안다.

그 빈자리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삶이 부모님을 그 자리에 묶어둔 것뿐이었다는 걸.

내게 무리해서 시켜준 피자 한 판이, 부모님이 할 수 있었던 가장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퇴근길,

엄마가 좋아하는 빵을 사고 아버지가 즐겨 드시는 막걸리를 챙겨 집으로 향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부모님의 빈자리에서 배운 다정함이며, 그 묵직한 사랑에 대한 나의 늦은 답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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