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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등을 이제야 봅니다

에필로그: 나의 첫 번째 인연에 대하여

by 서이안

어젯밤, 아버지는 27년간 근무한 택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씀하셨다. 두 달쯤 푹 쉬면서 맘 편히 등산이나 가고 싶다는 당신의 뒷모습이 유난히 작아 보였다.


젊은 시절, 부모님과 동생들을 위해 평생을 뛰었고, 결혼 후에는 가족을 위해 모든 걸 걸었던 사람. 평생 아들의 성공을 자신의 성적표로 삼고, 때로는 술에 취해 돌아가신 당신의 어머니를 부르던 사람. 나는 그 쓸쓸한 등을 보며, 나의 첫 번째 인연이었던 '아버지'라는 한 남자의 삶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평생 장남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 젊은 시절 보증을 잘못 서 집을 나간 동생(나의 삼촌)을 찾아 헤매야 했고, 이혼 후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동생(나의 고모)과 남겨진 슬픔을 앞에 두고 서로의 상처를 헤집으며 다투기도 했다.


아버지의 하루는 늘 고요한 전쟁 같았다. 회사택시 기사였던 그는 저녁 7시면 잠자리에 들고, 새벽 2시에 일어나 일을 나섰다. 하루 벌고 하루 쉬는 삶. 쉬는 날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집안을 청소하고, 홀로 등산을 떠났다. 저녁은 늘 5시면 차려졌고, 당신의 밥상에는 거의 매일 술이 한두 잔 올랐다. 제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들었을까. 아니면, 그게 삶의 유일한 낙이었을까. 늘 다음 날 새벽 출근이라는 보이지 않는 짐을 어깨에 이고 있던 아버지. 그의 서툰 애정은, 그런 치열한 일상 속에서만 겨우 얼굴을 내밀었다.


'내 택시 한 대 있으면 좋겠다.'던 그 소박한 바람조차, 매년 현실 앞에서 꺾였다. 아마 27년간 일하던 택시 회사를 그만두려는 건, 올해도 반복될 그 좌절을 견디기 힘들어서 그랬으리라.


그는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불같이 화를 내야 했고, 엄격한 회초리를 들어야 했다. 어린 나는, 그때마다 두려움 속에서도 묘한 안쓰러움을 느꼈다. 나는 그의 분노에 상처받으면서도, 그의 어설픈 다정함 아래에서 자라났다.


어린이집에 다니던 어느 날, 아버지가 양복을 입고 나를 데리러 오셨다. 그날 처음 본 아버지의 양복 차림은 유난히 낯설고 멋져 보였다. 그 후로는 늘 택시기사 제복을 입은 모습이었기에, 그날의 장면이 오래된 필름처럼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힘들다며 투정 부리는 아들을 굳이 산 정상까지 끌고 올라가, "아빠는 너랑 이렇게 대화하는 게 좋다"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쓸쓸했던 목소리. 뚱뚱한 몸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 고개를 젓던 아들의 손을 억지로 끌고 목욕탕으로 향하던 그의 서툰 애정. 어쩌면 당신도,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아들과의 로망이었을까.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나는 수많은 인연들을 떠올렸다. 나를 살린 선생님, 나를 일으켜준 친구, 나를 성장시킨 동료와 제자들. 그 모든 다정한 인연들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고백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인연의 시작점에는, 서툴고 때로는 아팠지만, 단 한순간도 나를 향한 끈을 놓지 않았던 아버지가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공부하는 나를 보며 "아버지 같은 인생 되면 안 된다."라고 말했던 아버지. 그때는 차마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진심을 이제는 안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책이 아니라, 아들만큼은 더 넓은 세상에서 더 환하게 웃기를 바랐던, 당신이 할 수 있었던 가장 절박한 사랑 고백이었다.


이제야 아버지의 굽은 등을 본다. 분노와 상처, 희생과 후회, 그리고 서툰 사랑이 빼곡히 새겨진 그 넓고 쓸쓸한 등. 나는 이제 그 등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말없이, 힘껏 안아주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야 아버지의 등을 이해하게 되었듯, 나는 오늘도 교실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려 애쓴다. 그 마음의 시작이 바로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정한 사람이 살아남는다』의 마지막 이야기다. 평생 그의 등을 보며 자랐지만,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나의 첫 번째 다정함은 그 넓고 쓸쓸했던 등에게서 배웠음을...


이것은 나의 첫 번째 인연이자 스승이었던 아버지를 향한, 못난 아들의 길고 늦은 답장이다.



아버지! 당신의 서툰 사랑이 결국 저를 이렇게 다정한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이제는 제가 당신의 등을 지켜드릴 차례입니다.


아버지의 새로운 봄날을 응원하며, 큰아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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