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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곁에 있어줄까

젊은 이는 늙고 늙은 이는 죽는다

by 서이안

고 이어령 박사님께서 생전 인터뷰 중에 남기신 말씀이 있다.
“젊은 이는 늙고, 늙은 이는 죽어요.”
처음엔 그냥 지나쳤던 말이었는데,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 한 문장이 자꾸 마음에 맴돈다.
늙는다는 건 단지 주름이 늘어나는 일이 아니라, 점점 더 사라져 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주말, 특별한 일이 없던 나는 또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학창 시절부터 친구가 많지 않았던 나는, 시간이 남으면 늘 도서관에 갔다.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그냥 가만히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도서관은 여전히 내 곁에 머물러주는, 드문 친구 중 하나다.


책을 몇 권 집어 들고 한참을 읽다가, 저녁을 먹을 겸 밖으로 나왔다. 조금 먼 역 근처 만둣집이 문득 생각났고, 산책할 겸 30분쯤 걷기로 했다.

걷는 동안 스치는 풍경들이 참 좋았다. 자동차 소음 사이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도로 옆 풀들이 흔들리고, 그 순간순간들이 기분 좋은 멈춤을 선물했다.


육교 밑을 지날 때, 익숙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어르신들이 장기를 두고 있었다. 어떤 분들은 옆에 앉아 윷놀이를 하기도 하고, 또 다른 분은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고 있었다.
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나는 이 풍경을 본 적이 있다.
다를 것 없이 비슷한 풍경.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그대로인 건 아닐 텐데, 마치 장면이 복사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소란스러웠지만, 그 소란함이 오히려 깊은 고독을 가리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한바탕 치열하게 삶을 견디고 난 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저 육교 밑이 마지막 섬이 된 것만 같아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나 혼자 걷고 있는 이 길의 끝에는,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나이 들면 어떤 모습일까. 어떤 자리에서, 누구와, 무얼 하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바라는 게 있다.
나이가 들었을 때, 내 곁을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내게 조언을 구하고, 인생의 이야기를 묻고, 가만히 앉아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젊은 이들. 그들이 기꺼이 시간을 내어 머물다 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읽고, 더 다정해지고 싶다. 어른이 된다는 건 결국 지혜로 말하고, 사랑으로 듣는 사람이 되는 일 아닐까.


지난 어느 날, 이어령 박사님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를 고려대학교 베리타스 포럼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한걸음에 달려갔다. 대강당은 가득 찼다. 학생도, 교수도, 중년의 시민들도 함께 있었다. 누구도 박사님의 마지막 말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박사님은 말년에 암투병을 하시면서도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끝까지 언어를 통해 사랑을 남기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생각했다.
저렇게 지혜로운 어른이 되고 싶다.
고독을 사랑할 줄 알고,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단단하고도 다정한 노인이 되고 싶다.


나는 아직 젊다. 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음을 분명히 알아간다. 내가 오늘도 책 한 장을 더 넘기고, 한 걸음 더 깊이 사색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먼 훗날 누군가 내게 기댈 어깨를 찾을 때,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기도 때문이다.


"선생님,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언젠가 한 젊은이가 나를 찾아와 건네줄 이 한마디를 위해, 나는 오늘도 조금 더 지혜롭고,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려 애쓴다. 그것이 내가 죽음이라는 종착역 앞에서, 끝까지 의미 있게 살아남는 방법임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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