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인사가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다.
요즘도 가끔 생각에 잠긴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조금 더 다정했더라면, 조금은 덜 조급했더라면, 혹은 지나간 누군가의 손을 한 번 더 붙잡았더라면.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도는 날이면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게 된다.
대학생 시절, 공강 시간마다 친구들이 맛집을 찾아다닐 때, 나는 주로 중앙 도서관에 머물렀다. 조용한 공간 속에서 책을 읽고, 노트에 문장을 옮겨 적고, 가끔은 창밖을 오래 바라보기도 했다. 방학 중에는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곳이 내가 세상과 연결되는 가장 조용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 같은 수업을 들어본 적도, 함께 어울려본 적도 없던 선배들이 있었다. 단지 같은 과라는 이유만으로 도서관에서 마주칠 때마다 웃으며 인사해 주던 선배들. 말수가 적고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던 나에게 그 인사는 뜻밖의 다정함으로 다가왔다. 소심했던 나를 버티게 해주는 것은 “밥은 먹었니?” 같은 따뜻한 관심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다정함이 나를 지탱해 준 힘이었던 것 같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읽으며, 그 시절이 떠올랐다. 주인공 노라는 삶의 여러 갈래에서 선택을 후회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다 삶을 포기하려는 순간, '자정의 도서관'이라는 공간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그녀가 살아보지 못한 인생들이 책이 되어 한 권씩 꽂혀 있다.
노라는 책장을 펼칠 때마다, 다른 선택을 했던 삶 속으로 들어가 살아보게 된다. 수영 선수가 되기도 하고, 밴드 가수로 세계를 누비기도 하며, 결혼 후 펍을 운영하는 삶도 살아본다. 하지만 그 모든 삶 속에서도 노라는 완전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어쩌면 문제는 삶이 아니라, 사랑이 빠져 있었던 마음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노라는 점차 깨닫는다. 자신이 그동안 경험했던 관계들 속에서 사실은 사랑받았고, 또 사랑하고 있었음을. 그녀가 삶을 포기하려 했던 건 '불행해서가 아니라, 그 불행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 이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내 마음 어딘가에도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우리는 종종 후회 속에서 살아간다. 더 좋은 선택을 했어야 했다고,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하지만 그 선택들 사이에는 늘 누군가의 다정한 눈빛이나 조용한 손길이 있었음을 잊곤 한다. 그걸 다시 떠올릴 수 있다면, 지금의 삶을 조금은 다르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책의 마지막에서 노라는 종이에 단 하나의 문장을 남긴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다.
"나는 살아 있다."
삶은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아주 짧은 인사 하나가, 무심한 다정함이, 다시 살아갈 이유가 되어준다.
소심한 성격으로 학창 시절을 보낸 나는, 복도에서 나에게 먼저 인사하기를 망설이는 아이들의 눈빛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린다. 그래서 나는 먼저 인사한다. "안녕, 잘 지내?" 밝게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인다. 단 몇 초의 인사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너를 환대하고 있다는 걸 전하고 싶다. 학교를 다니는 3년 동안 내 수업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졸업할지도 모르는 아이들이지만, 나는 그 짧은 순간에라도 다정한 마음을 건네고 싶다.
그 마음은 내 대학 시절, 선배들의 작은 인사에서 배운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기를, 나의 다정함이 누군가를 오늘 하루 더 살아가게 했기를, 조용히 바라본다.